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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문/실학자 박지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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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조선시대 북학파(北學派)로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했다. 그는 기발하고 자유로운 문체로 여러 편의 한문소설도 썼다. 소설을 통해 박지원은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등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전문-

박지원은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거나 망건을 쓰지 않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지낸다. 손님이 와도 말 없이 쳐다만 보는 경우도 많다. 또 술에 취해서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졸고, 그러다가 종일 잠을 자기도 한다. 때때로 밖에 나가 길가는 장사꾼을 붙들고 세상사를 토론한다. 어떤 때는 짐승들과 마주 앉아 친구처럼 장난을 친다. 밥알로 날짐승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양반 사대부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는 자신의 생활이 자유롭고 분방할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허례를 기탄 없이 질타한다.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놀면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양반들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지원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도 남다르다. 보통 사대부들과 달리는 그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청나라가 오랑캐라는 고루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과감히 도입해 조선의 자아와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북학론이다.

한편 박지원은 1777년(정조 1)홍국영에 의해 벽파(僻派;사도세자의 폐위와 아사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당파싸움에서 세자를 배척한 당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위협을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며 가난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겸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돼 청나라에 동행했다.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접한 박지원은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썼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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