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만에 제시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 세상 관심은 과연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에 쏠려 있다.
KBS 스페셜(1TV)은 4일 오후 8시 6년 3개월이라는 긴 세월 중앙정보부를 휘두르던 김형욱의 최후를 다룬 "중정부장 김형욱은 왜 죽었나"를 방송한다.
5·16 군사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던 육사 8기생 가운데 김형욱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성적도 최하위였고 두드러지는 면도 없었다.
그런 그가 중정부장의 자리에 앉은 것은 초대 부장이자 같은 8기생인 김종필 덕분이었다.
JP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권을 이어갈 만한 인물로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김형욱은 박정희를 택했다.
중정부장 취임 후 처음부터 JP를 배척해 갔다.
김형욱은 JP와 JP 주변의 정치인들을 끊임없이 사찰하면서 결국 JP를 몰아내고 3선 개헌에 크게 기여하기에 이른다.
반면 그에 대한 비판은 커져갔다.
이만섭 공화당 의원 등은 '김형욱과 이후락을 몰아내라'는 전제 조건 아래 3선 개헌에 찬성했다.
그리고 3선 개헌안이 통과된 3일 뒤, 김형욱은 해임됐다.
이후 김형욱은 정치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다 73년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 김은 침묵했다.
그러던 중 76년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가 터졌다.
김형욱은 박정희가 보낸 특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 청문회에 섰고 '로비스트 박동선은 내가 조정한 공작원' 'DJ 납치' 등을 폭로하며 마치 반체제 민주인사인 듯이 행세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회고록'을 쓰며 박정권을 압박해 갔다.
'회고록'은 프레이저 청문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박정희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었다.
박정희는 '용서란 있을 수 없다'며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게 했고 김재규는 '김형욱 암살단'을 조직, 훈련에 들어갔다.
김형욱과 김재규가 회고록을 놓고 150만 달러에 협상을 벌이던 중 회고록은 일본에서 요약본이 출판됐다.
그리고 김형욱은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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