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육환장이 그리울 때

옛날 스님들이 길을 나설 때나 야단법석(野壇法席)을 할 때는 '육환장(六環杖)'이라는 이상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육환장은 긴 막대기 위에 둥근 고리가 박혀 있고, 큰 고리위에 여섯 개의 작은 고리가 걸려 있는 지팡이를 말한다. 깊은 산길을 걸을 때가 많았던 그 시절에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걷는 것이었으므로 이 육환장은 언제나 여행의 길벗이었다. 자기 키 보다 더 큰 육환장을 땅에 짚으면 여섯 개의 고리에서는 절겅절겅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스님들이 이 육환장을 짚고 다녔던 이유 중 하나는 산길을 갈 때 길가의 미물과 곤충들이 절겅거리는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해 밟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새나 짐승들이 갑자기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한 지극한 자비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특히 스님에게는 그 소리가 맹수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받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육환장이 모든 동물에 대한 호신장(護身丈)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인간이 반드시 지녀야 할 여섯가지 덕목(德目)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섯개의 고리 중 첫 번째 고리는 널리 '베풂'을 의미한다. 얼마 전 스리랑카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번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너무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스리랑카 스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불광사에서 애써 모은 헌 옷가지와 생활용품, 학용품 등을 들고 몇몇 불자와 멀리 스리랑카를 방문을 했다.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현지인들의 곤궁한 모습에 큰 충격을 느꼈다. 동행한 불자마다 한결같이 "대한민국에 태어났음을 감사히 여긴다"는 말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정성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보고 우리는 소욕지족(少慾之足)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두 번째 고리는, 나쁜 행위나 습관으로 저지르는 그릇됨을 막고자 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상징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역할, 스승과 제자로서의 역할, 종교인과 정치인의 역할 등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고리는 참고 견디는 인욕(忍辱)의 고리이다. 논어에서도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눈앞에는 부모 자식간에, 형제간에 재산 싸움으로 가문에 오점을 남기고, 타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참담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참아야 할 일들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그 참음은 억지 참음이 아니라 인욕(忍辱)이라는 큰 자비가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한다.

네 번째 고리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라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깨끗한 새로운 물을 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나날이 발전하는 좋은 날이어야 한다.

다섯번째 고리는, 흐트러진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사유하는 마음으로 번뇌를 잠재우는 방편을 의미한다. 우리의 번뇌를 108번뇌라 하지만 어찌 백팔 번뇌 뿐이겠는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이 번뇌망상이다.

마지막 고리가 지혜의 고리이다. 완전한 지혜, 인간적인 이성을 초월한 무분별(無分別)의 지혜이다. 실레지우스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는 영리하거나 서두르지 않음에 있다' 고 했다.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것이다. 백과사전이 지식이 될지언정 지혜가 될 수는 없다. 글을 알아도 지혜롭지 못하는 이가 있고, 글을 몰라도 지혜로운 이가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식의 분량이 아니다. 지혜로 살아가는 삶이다. 옛날 길이 좋지 못할 때 큰 스님네들이 짚고 다녔던 육환장이 요즘 같은 혼탁한 세상, 이 어려운 사바세계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 다투며 더 많은 재물을 탐하는 중생들, 제 역할도 못하면서 책임전가에만 급급한 인사들, 참을성 없이 함부로 말만 앞세우는 원님들, 노력없이 한탕주의에 빠져 있는 투기꾼들, 마음을 잡지 못해 철새처럼 떠도는 지혜롭지 못한 이 땅의 모든 중생들에게 육환장의 절겅절겅 소리가 절실할 것 같다.

돈관 불광사 주지·경북불교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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