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 사람들-상주 화남면 동관2리 절골

태풍 '나비'가 온 세상을 검게 뒤덮던 어느날 찾은 상주시 화남면 동관2리 절골. 마을 입구에서부터 속인(俗人)인 취재기자의 탈(脫)세상을 반겼다. 좁은 비탈길 왼편으로 버티고 선 세 그루의 소나무는 '어서 오라' 허리숙여 인사하는 듯, 장승처럼 세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는 듯, 보는 것 만으로도 든든하게 한다. 길 양 켠에 흐드러지게 핀 이름모를 들꽃 무리들은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세상에 찌든 마음의 때를 이미 반쯤 벗겨줬다.

산 깊은 품 속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몇년 전만 해도 동관2리 마을회관에서 비포장도로를 1시간 이상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앞쪽으로 산 봉우리들이 겹겹이 연꽃모양을 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속리산 형제봉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옆으로는 구병산이 한달음에 마을 어귀로 내려앉은 형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바깥 세상의 소음과 혼탁함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듯.

마을 배춘남(77) 할아버지는 낯선 사람들의 출현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제서야 "외지사람을 하도 오랜만에 봐서 뭔일인가 싶었어"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 이내 하던 일을 계속 한다.

100여평 남짓한 텃밭에는 열무와 참깨, 고추, 파 등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농약을 치지 않아 고추는 탄저병 피해가 심각했으며 열무 잎들은 벌레들이 파먹어 군데군데가 구멍이다. 그나마 성한 것은 대파가 전부다. 대파 몇 뿌리를 점심 찬거리로 뽑아낸 배 할아버지는 마을 입구에 콸콸 흘러내리는 자연수에서 흙을 씻어낸다. "이 물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자연수야. 오염되지 않은 물이니 그야말로 약수지."

10여년 전 도회지 생활을 청산하고 이 곳에 홀로 찾아들었다는 배 할바버지는 요즘 '태극도' 공부에 심취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산에 올라 나무을 뜯고 지치면 방에서 심신을 달래는 게 하루 일과다.

배 할바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정원 가꾸기. 정원은 금잔화, 루드베키아, 백일홍, 다알리아 등 울긋불긋한 꽃들로 가득하다. 손수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집 담장에도 보라색과 연분홍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입구에 옹기종기 들어선 집들 뒤로 돌아서자 제법 넓은 구릉과 평지가 제법 큰 규모의 절터였음을 짐작케한다. 산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제법 깊은 곳에 암자가 조용하게 앉아 있다. 이 곳에는 몇몇 학승들이 수행을 하고 있지만 탁발수행을 나갔는지 빈 암자만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에는 배 할아버지외에 강홍규(85)·양택린(83)씨 부부, 심성열(54)씨 부부가 살고 있다. 수원에서 살다 왔다는 심씨는 이 곳에 터를 잡은 후 부인과 결혼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심씨에게 가장 큰 행복은 산을 오르고 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식도 두지 않기로 하고 도회지 생활에서 찌든 심신을 달래고 자연적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마침 점심 준비를 하던 심씨는 갓 뽑아낸 열무에다 고추장으로 버무린 잡곡밥 한 그릇을 내밀었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허기가 돌던 참에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 곳에서의 삶은 볼품없는 것들이지만 건강하고 욕심없는 삶이죠. 도시사람들이 하루만이라도 이 곳에서 자연적 삶을 산다면 건강한 인생을 되찾을 수 있을겁니다." 심씨의 충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18살때 고향 평안북도 영변을 떠나 강원도에서 7년간 농사를 짓다가 해방 이후 절골로 들어왔다는 강홍규 할아버지와 양택린 할머니는 벌써 60년째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지난 1970년대 중반 20여가구가 넘던 화전민들이 정부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떠날 때도 강 할아버지는 끝내 이 곳을 지켰다.

강 할아버지는 "시내에 안 나가본지 벌써 5년쯤 됐다"고 했다. 농협 조합장 선거때 한 후보자가 보낸 승합차를 타고 면소재지 구경을 한 게 마지막이란다. 이발과 목욕 등은 노부부가 서로 해결해주고 생활필수품은 가끔씩 들어오는 차량 행상에서 구입한다. 생활비는 경기도 평택에 나가있는 아들이 보내준다.

산 속 생활에 대해 양 할머니는 "뭔 불편이 있나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게 살고 있는데. 텃밭이나 가꾸는게 낙이지요."라며 소녀같은 수줍은 미소를 띤다.

500여평의 밭에다 깨와 고추, 옥수수, 감자 등 농사를 짓는 강 할아버지는 "여름이야 텃밭 가꾸는 소일거리라도 있지만 겨울철에는 아무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며 "가끔씩 산에 올라 약초와 나물을 뜯는게 전부"라고 했다. 어떤 욕심도 없이 그저 자연속에 파묻혀 자연이 가르치는대로, 자연이 가져다 주는 것들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자연인들의 모습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는 가끔씩 들어오는 집배원과 트럭 행상이 전부다. 그들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고 자식들이 보낸 편지와 용돈을 받는다. 바깥세상으로 나가려면 1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기에 애써 바깥세상을 동경하거나 찾지않는다.

이 마을을 찾았을 때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온함이 가슴 가득 들어찼다. 마을을 떠나는 낮선 세상 사람에게 "언제 다시 와여"라 인사하는 강 할머니에게선 사람의 정이 물씬 묻어난다.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사진 : 절골에서 60여년을 살아오고 있는 강홍규·양택린씨 부부는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게 벌써 5년이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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