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삶이 먹구름 낀 날처럼 무겁고 어두울 때, 사랑과 자비라고 말하는 것이 모두 거짓이고 말뿐일 때, 정말로 그리워할 수 있는 것. 시멘트 건물들과 우르릉거리며 달리는 자동차들 틈에서 신호를 몇 초만 어겨도 목숨을 잃는 각박한 도시 가운데서도 그리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어딘가는 하나 묻어 두어야 한다. 타설한 콘크리트처럼 나이 들며 삭막하고 차갑게 무디어 가는 감성을 깨워 줄 독한 소주 같은 그리움 하나, 가슴에 꼭꼭 묻어 두고 살아야 한다. 낙엽이 흩날리는 이 가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길모퉁이, 오래된 사진 속에 비친 햇살처럼 울컥 솟는 그리움.
수많은 나뭇잎이 삶을 마치고 가지를 떠나고 있다. 많은 일들을 했다. 햇살과 물과 탄산가스를 받아들여 녹말을 만들어, 나뭇가지와 뿌리를 한 뼘쯤 높아지고 깊어지게 하고, 몇 마리의 새들을 숨 쉬게 하고.
한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삶을 긍정할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삶의 무의미함 속에서 세상은 살아볼 만큼 아름다웠다. 그 세상이 가을 물든 잎들과 바람과 노을 속에 저렇게 아름다워, 이제는 불가피한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아름다움 속으로 떠나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바람에 흩날려 가는 저 낙엽들의 가벼운 몸놀림, 자유.
내가 눈 뜨면 나에게 있고, 내가 눈 감으면 나에게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 있다. 몇억 광년 먼 곳의, 오래전으로부터 오는 저 별빛 하나도 나의 시각과 감성에 자극을 주어 뇌 신경세포들의 회로를 변경시켜 기억과 감정으로 자리 잡는다. 내 열 살 때의 가을날 웅덩이 가에서 혼자 바라보았던 코스모스 한 송이는 지금 이렇게 나에게 작용하고 있다.
아무도 알고 태어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누구가 되어야 하는지. 한참을 살다가 분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의문을 가져 보나 역시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러저러한 세상 속에 이러저러한 조건을 가지고 던져져 있을 뿐. 이렇게 던져져 있는 나는 변경시킬 수 있거나 없는 조건들 속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어 갈지를 선택한다. 그것이 의미 있느냐고? 촛불 한 자루를 켜놓은 밤이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고 촛불이 비추는 만큼만 밝혀져 있다. 촛불은 하룻밤을 타고 꺼진다. 그리고는 영원한 어둠이다.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 나는 춤추고 노래할 수 있고, 잠자고 쉴 수도 있으며,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사랑을 할 수도 있다. 무엇이 의미 있느냐고? 무의미하다. 주어진 의미라고는 없다. 내가 의미롭다고 느끼는 것만이 의미롭다.
내게 주어진 시간, 내게 주어진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 스무 살에 등산을 갔다가 비 맞고 신세졌던 산사의 스님이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일러주었다. 자기 삶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세상 속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정신건강이다. 그저 일상의 지나치는 길모퉁이들이,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살아 숨 쉬는 그리움이 된다. "당신이 지금 맞이하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한 내일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글을 처음 남긴 분께 감사 드린다.
좌익 성향의 사람들이 영화 등, 예술과 문화적인 생산 능력을 키우는 동안, 대한민국의 정통세력들이 그런 노력에 태만하여 문화적 경쟁력을 잃어서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나타나므로, 정통세력도 문화적 역량을 높이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대한다. 부분적으로는 진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주장이 예술적으로 잘 포장돼서 전달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아름답고 진실하고 인간답고 좋기 때문에 이끌리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 진실과 사랑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누구나,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고 싶어지도록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쪽에서 지적하는 문제점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쇄신하는 살아 있는 노력도 해야 한다. 막가는 욕설과 적개심, 억지 주장, 모략, 술수, 폭력이 아니라 진실과 사랑과 생명이 어느 쪽을 지향할 때 더 잘 피어날 수 있는가를 드러내야 한다.
거짓을 상대하는 것은 또 다른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다.
최태진(최태진신경정신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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