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尹致昊), 창씨명 이토 치카우(伊東致昊)는 1945년 12월 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방 이후 불어닥친 친일파 규탄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타협적 개량주의자의 변절 행로.' 그의 생애는 이렇게 정리된다.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 중 한 명으로 윤치호는 개화사상을 수용한 인물이었다. 갑신정변 때는 개화당의 일원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외친 활동가였다. 1898년 쯤에는 독립협회 회장과 주필, 만민공동회 최고 지도자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해 신민회에도 관여해 근대 민족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그였지만 한 번의 선택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는 1913년 일제의 '105인 사건' 주모자로 체포됐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특사 출감했다.
이때부터 그의 친일행적이 시작됐다. 일제의 일선(日鮮)융화에 동조해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동원체제 확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자살 2달 전 그는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한 일을 두고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는 말을 남겼다.
지식인으로서 '변절'에 대한 어떠한 참회도 들어있지 않았다. ▲1877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지 창간 ▲1986년 전북 김제군 금산사 대적광전(보물476호) 전소.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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