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혁당 사건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지난 30년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투옥된 뒤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불과 20여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편(하재완·당시 43세). 고인을 추억하던 이영교(71) 씨의 눈에는 금세 이슬이 맺혔다.

"목욕탕에 간다며 집을 나섰는데 이내 소식이 끊겼어요. 죄없는 남편을 끌고간 유신정권은 면회나 편지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게 했어요. 몇 달 만에 법정에서 본 남편은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건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죠. 그때가 이승에서 남편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뒤 이 씨는 2남 3녀를 홀로 키워야 했다. 남편 없는 설움에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진 이 씨, 그리고 자녀들에겐 하루 하루가 살을 찢는 고통이었다. 주위에선 이 씨가 지나가면 '남편이 간첩'이라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집 담벼락엔 '간첩을 쳐 죽여라'라는 낙서가 휘갈겨졌다.

정보형사들도 이 씨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뒤따라 다녀 '남편이 죽자 다른 남자를 끌어들였다'고 시댁식구들이 오해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 씨를 힘들게 한 것은 어린 자녀들이었다.

"3살배기 아들을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간첩이라며 때리기도 했어요. 소문을 듣고 달려가보니 제 아들은 나무에 묶인 채 '이제 간첩 안할래'라며 울고 있더군요. 나무에 묶인 아이를 보는 순간 눈에 불꽃이 튀고, 뼈가 녹아 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까지 비난에 가세했어요.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요? 제 아이들이 빨갱이라 놀리는 아이들을 때려 치료비를 물어준 적도 있었습니다."

고(故) 하재완 씨와 함께 사형이 집행된 고(故) 송상진 씨의 미망인 김진생(77) 씨. 그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이 씨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1979년 남민전 사건 이후에는 인혁당 유족 부인들이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유신정권 하의 경찰은 연약한 여자의 몸에 몽둥이 세례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

"얼마나 당했냐고요?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 정보 형사는 끈질기게 우리를 감시했어요. 한 형사는 '저 여자 미친 여자'라고 주위에 떠들며 다녔지요."

김 씨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남편은 고문을 못 이겨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법정에서 본 남편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어요. 사형이 집행된 뒤 정부에선 중장비를 동원, 남편의 시신이 실린 영구차를 통째로 들고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해버리고 유골만 제게 넘겨주더군요. 남편 몸에 난 고문 흔적을 숨기려고 그랬을 겁니다. 남편을 죽인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유족 및 생존자 가족들은 7일 오후 대구 중구 '대구여성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 차원에서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해줄 것"을 촉구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사진설명=1974년 인혁당 사건이 '고문조작'이라는 국정원 과거사진상규명위의 발표가 나오자 7일 오후 인혁당 사건 관련 동지 및 희생자 유가족들이 칠곡 현대공원묘지 희생자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유가족 김진생(77) 씨가 남편 송상진의 묘에 헌화하며 오열하고 있다. 김태형기자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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