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에 넣으면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나던 오디를 기억하십니까? 너무 많이 따먹어 입이 시커멓게 변해도 마냥 맛있어 자꾸 먹고싶던 오디..."
오디는 뽕나무 열매다. 먹고 살고 힘든 시대였던 60년대 후반 이후 경북을 포함한 전국 농촌은 온통 뽕나무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열매인 오디는 먹을 게 부족했던 아이들의 훌륭한 간식꺼리가 됐다. 지천으로 깔린 게 뽕나무였던 그 시절, 누에 먹이였던 뽕나무는 우리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었다. 겨울철 농한기 유휴노동력을 활용해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작목이 양잠이었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이 진행되면서 농촌은 쌀과 보리 위주 농업에서 잠업 등 고소득 특용작물로 전환하면서 부촌으로 탈바꿈해 가기 시작했다. 산비탈이나 하천부지를 개간,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먹이고 이를 되팔아 높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양잠은 다른 농사와는 달리 뽕나무심기에서부터 뽕밭 퇴비넣기, 잠체소독, 누에고치 생산 및 공판 등에 이르는 전 과정의 교육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마을마다 농촌지도소를 통해 뽕나무 재배 및 누에 사육지도를 받았다.
'제2차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추진되던 1968~1972년 김천에서는 잠업농가가 급격히 증가했다. 남면 부상(扶桑)리는 신라시대부터 불린 지명에 걸맞게 뽕나무밭이 가장 많았다. 80여 농가들은 집집마다 누에 10여 장(장당 누에 2만여 마리)을 사육하면서 여름철이면 누에 사육, 수매 등으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이 마을엔 아직 속칭 '번데기들'이라고 불리는 들녘이 있을 정도다.
당시 누에 24장을 사육하면서 금릉군 잠업농 대표를 맡아 농림부장관상을 받았다는 이인주(69) 씨는 "당시 이장은 잠업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며 "잠업은 천수답이 많고 벼농사가 적었던 마을에 큰 소득원이 돼 농가 생활수준을 높이는 힘이 됐다."고 기억했다.
이 마을을 담당 공무원이었던 박명수(52·김천시 홍보담당) 씨는 "여름철 마을에 가면 누에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로 들릴만큼 누에 사육농이 많았고 수매 기간동안은 온 가족들이 매달려 몇날며칠 밤을 세워가며 일했다."고 말했다.
김천 대항면 복전리도 양잠으로 부를 일군 대표적인 마을이다. 1972년 복전리 125가구 720여 명이 잠업에 종사하면서 누에 30장을 사육하는 대규모 농가도 있었고, 경부선 철로변과 다락논 등에 모두 뽕나무를 심었을 정도였다. 이원기(59·시의원) 씨는 "잠업으로 농가소득을 높여 자립기반을 일찍 마련했다."고 말했다.
구미(당시 선산) 고아읍 봉한리도 마을 전체가 잠업에 종사하면서 가난을 물리쳤던 마을로 기록돼 있다. 낙동강 제방이 없던 당시 농사를 지을만한 변변한 땅이 없었던 이 마을에 새마을 운동이 퍼지면서 주민들은 하천부지와 산비탈을 개간해 너도나도 뽕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마을 앞 도로가 6차선으로 뚫리고 인근에 20층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도시가 됐지만 1980년대까지는 마을 전체가 뽕나무로 둘러 쌓였다.
김병조(75)·이화이(71) 씨 부부는 "주민들이 2천여 평의 산을 개간, 뽕나무를 심고 매달린 결과 처음엔 2장 정도에서 몇 년 후부터는 나무가 자라는 만큼 잠업 규모도 늘어 한집 평균 7, 8장을 사육했다."며 "덕택에 자식들의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백식(70) 씨는 "농한기 부업으로 누에 2장∼5장 정도를 사육했는 데 당시 마을에 돈이 흥청망청했다."며 "그때 개간한 땅 2천여 평이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됐다"고 했다.
의성 다인면 송호1리 속칭 송화골 경우 30여 가구가 모두 누에를 쳐 모내기철인 5월 말~6월에는 하루 두시간 이상 잠자기가 힘들었다. 60년대 초부터 양잠을 했다는 정윤섭(69) 씨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는 마을 전체가 뽕밭이었으며 양잠 덕분에 집집마다 밥 거르는 일이 없었다."면서 "그때 양잠이 아니었으면 자식들 공부는 물론 먹고살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매자(여·75) 씨는 "송화골에 처음 시집을 왔을 때만 해도 마을 대부분은 살기가 무척 어려웠으나, 양잠을 하면서 부자마을로 변했다."며 "아이들은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많이 먹어 입이 시커멓게 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잠이 호황을 누리면서 봉양면 소재지인 도리원에는 '상신제사'라는 제사공장이 직원 500여 명으로 문을 열었다. 공장내 기숙사가 부족, 여공들은 도리원과 인근 마을에서 자취생활에 나서면서 빈 방이 없을 정도가 됐고 덩달아 지역 상권도 호경기를 맞았다. 공장 직원은 대부분 20대 전후의 여성들로 장가 못간 총각들과의 결혼이 유행처럼 됐다. 지금도 도리원과 인근 마을을 찾아가면 당시의 제사공장 직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접어들면서 석유파동에다 나일론·폴리에스터 등 합섬섬유의 출현, 노동력 부족 등으로 1980대 중반부터 양잠의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뽕나무 밭은 경제성이 높은 자두·포도밭 등으로 변했고, 90년대에는 잠업농가를 찾기 힘들 정도가 됐다.
황재성·이창희·이희대·정창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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