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이 다 지나간다. 나라를 지키고 겨레를 살려낸 공훈에 보답하자고 정해둔 달인데, 정말로 '호국'을 평가하고 제대로 '보훈'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현충일 추모식장에서 마주친 80세 전후의 노병과 미망인들의 얼굴에서 자긍심이란 찾을 수 없고, 불쌍해 보인 나머지 참담한 느낌마저 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을 전후해 '집권 20년 시나리오'가 소문으로 떠돌았다. 장차 20년 동안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할 전략인데, 그 핵심은 편 가르기였다. 국민을 철저하게 두 편으로 나누되, 1%만 앞서도 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그것도 적어도 20년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출범 초기부터 이 정부가 입으로는 국민 통합을, 실제로는 편 가르기에 몰두할밖에. 한쪽에는 친일파, 군부독재자, 보수세력, 우파, 노년 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 진보세력, 좌파, 청년 등을 줄 세웠다.
전자는 악이고, 후자는 선이다. 선악이 선명하게 나뉘면, 집권을 지속시켜 나가기 쉽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사에 집요하게 매달린 이유가 거기에 있고, 심지어 나이 든 사람은 투표장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요구한 일도 이 때문이리라.
친일파나 독재자의 과오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권의 연장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전략 때문에 온전한 과거사 정리나 청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산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일이 흔하다.
정략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심지어 주장과 행보가 어긋나는 점도 나타난다. 이 정부가 친일과 독재를 청산하려면, 당연히 북한의 독재정권에게도 날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만 남쪽에서는 군부독재를 심판하자면서, 북쪽에 대해서는 군부독재와 동맹을 시도한다.
민주화운동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북한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반대로 나아간다. 말로는 불쌍한 북한 동포를 도와주자면서 실제로는 독재정권을 유지시키는 데 힘을 보탠다. 반대로 남쪽에서 그 동안 나라를 지키고 세워온 세력은 제거되거나 정리되어야 할 세력으로 규정한다.
이 정권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편 가르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공은 선양하면서 산업화에 대한 공은 짓밟는다. 편 가르기의 잘못은 많은 과오를 남겼다. 개화기 이후 우리 역사는 근대화와 자주화라는 두 가지 명제를 결코 통합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편이 나뉘었다.
근대화를 지향한 개화세력은 제국주의 침략을 끌어들였고, 자주성을 내세운 위정척사파는 침체의 늪을 헤맸다. 또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을 벌이던 두 집단은 모두 나라의 독립을 지향하면서도 행보가 달랐다. 전자는 무력항쟁을 벌이면서 군주사회를 고집하고, 후자는 공화주의를 지향하면서도 무력항쟁을 부정하였다. 심지어 계몽운동을 벌이던 학교를 의병이 습격하여 살상하기도 하고, 계몽운동가들이 의병을 극렬하게 비판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결과는 참혹한 망국으로 이어졌다.
뒤늦게나마 그 잘못을 깨닫고 조화시켜 나간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룡이다. 근대화와 자주화를 조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한 인물이 그였고,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을 통합시켜 만주 독립운동 현장에서 이를 실천해 나간 사람도 그였다.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면, 민주화와 산업화를 분리시키지 말고 하나로 통합하여 인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직 국민을 편 가르는 일에만 매달리는 전략을 보면서 답답하기 짝이 없다.
현충일 추모식에서 만난 노병과 미망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꼴통이자, 악의 축이 되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천시되고 폄하되는가. 그들은 준비 없이 치러진 전쟁 때문에 희생된 사람이요 가족이다. 폐허 속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서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쉴 날 없이 땀 흘린 산업화의 주역들이 저들이다. 결코 질 나쁜 보수 꼴통으로 폄하될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진정한 보훈의 대상이다. 악의 축도 아니고,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명예수당 몇 푼으로 그 분들의 영혼을 사려할 게 아니라, 그들의 삶과 선택이 우리 역사에서 정당하고 값진 것임을 평가하고 선양하라. 1956년 조지훈이 현충일 노래에서 '세월이 갈수록 아아-그 충성 새로워라'라고 말했듯이, 새롭고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보훈이다. 그러자면 잘못된 편 가르기보다는 통합의 길을 찾아라.
김희곤(안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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