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황태자 명예 찾겠다" 씨름판 돌아온 이태현

이만기와 강호동이 떠난 씨름판은 이태현(33)의 차지였다. 1999년과 2004년 무릎 부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제외하면 그는 13년간 '모래판의 황태자'로 군림했다. 630경기에서 472승 158패(승률 74.9%). 그가 올린 역대 최다승은 아직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씨름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던 2006년. 황태자는 종합격투기(MMA) 프라이드FC 진출을 선언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사각의 링에서 그는 더 이상 천하장사가 아니었다. 첫 경기 1라운드 KO패. 이후 3년간 종합격투기에서 보여준 그의 전적(1승2패)은 꽤 실망스러웠다. 3년의 외도를 접고, 그가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난달 28일 구미시청씨름단과 연봉 1억원에 1년간 플레잉코치로 재계약을 했다. 요즘 그는 대구와 구미를 오가며 잃었던 감을 되찾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 2일 오후 경북 구미초교 씨름장에서 실전 연습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씨름장 밖 시멘트 바닥에서도 그는 맨발이었다. 강한 인상의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모래판으로 돌아온 황태자

'시작!' 소리와 함께 이태현이 160kg의 거구를 뽑아들었다. 잇따른 들배지기와 덧걸이. 하지만 그의 팔꿈치가 먼저 모래에 닿는다. 지친 듯 고개를 숙인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어휴, 힘들다." 그의 몸매는 종합격투기 시절보다 꽤 불어 있었다. 넉넉하게 나온 배가 딱 '씨름 몸매'다.

그가 다시 기합을 넣었다. '아오~, 히유~' 그는 샅바를 맞잡고 설 때마다 높고 가는 소리를 냈다. 신나고 즐거울 때 그가 내는 소리다. 사각의 링에서는 그가 이런 소리 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아픈 허리를 매만지면서도 내리 4판을 더 겨룬 뒤에야 연습을 끝냈다. 그가 발가락을 움츠린다. "모래에 발바닥이 다 벗겨지니까 엄청 쓰려요. 손목이 다 찢어져서 샅바를 잡지도 못하겠고. 그동안 격투기를 하면서 새 살이 돋았는데 다시 죽여야죠. 바늘로 찔러도 느낌이 안 올 정도로."

그의 고민은 잃어버린 씨름감을 되찾는 것이다. 단숨에 적응하기에 3년은 꽤 긴 공백. "다리의 움직임이 늦어요. 붙으면 버티기는 하는데 제압하러 들어가는 반응이 느려졌어요."

그는 왜 씨름판으로 돌아왔을까. 일부에서 말하듯 '격투기에서 안 되니 씨름으로 돌아온 것'일까. 그는 세간의 비아냥이 답답한 듯했다. '불면증에 시달린다'고도 했다. "결코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에요.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수천 번 고민하고, 가족들과 주변의 충고도 들으면서 내린 결정이거든요. '이 거하다 안 되니 저 거한다'는 식으로 너무 쉽게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저 혼자 외국에 떨어져 있으니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하더라고요. 지난 경기에서 지고, 아내가 격투기를 그만두라며 울며 말리는데 '이게 다 내 욕심인가' 싶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 와중에 은사인 김성화 감독(구미시청씨름단)님의 간곡한 권유와 황규연·김정필 등 지인들의 충고에 마음이 흔들렸죠."

그는 동계훈련 스케줄을 가혹하게 짰다. 매일 오전 6시 기상. 1시간 동안 가벼운 러닝 훈련을 한 뒤 2시간 가량 파워트레이닝을 한다. 오후에는 2, 3시간 이상 실전 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유연성과 탄력을 키우는 운동을 할 계획이다. "아내가 굉장히 좋아해요. 다칠 걱정 없고, 원할 때 만날 수 있으니까. (아내 이윤정(29)씨는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울산 현대 코끼리씨름단 시절 룸메이트의 소개로 만나 6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악플은 천하장사도 쓰러뜨린다

-씨름을 그만두고 격투기에 뛰어든 이후로 거의 '인터넷 악플 공장' 수준이었죠?

"예전에 씨름할 때는 팬카페도 있었는데 종합격투기 첫 경기하고는 아주 데였어요. 그렇게 응원해주던 사람들이 시합에서 지니까 '너 그때 거기서 그러고 있을 때 알아봤어'라는 얘기를 막 하는 거예요. 길을 나가면 누군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대인기피증이 생기더라고요. 결국 3개월 동안 방에만 처박혀 있었는데 그걸 극복하는 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건전한 비판과 의견은 고맙죠. 하지만 일방적으로 매도해버리니까. 최홍만 선수나 많은 연예인들도 그런 심정일 거예요."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나요?

"아내는 처음에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했어요. 격투기가 뭔지 잘 몰랐으니까. 그런데 2006년 9월 첫 시합에서 TKO패를 당하니까 갓난 아들을 데리고 온 아내가 처음에는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그래요. 그러다가 사람들이 다 떠나고 방에 둘만 남게 되니 무릎을 꿇고 울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요."

-격투기에 뛰어든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후회라기보다 아쉬움이 많죠.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걸 해봤다는 떳떳함도 있지만 경기 내용에는 실망이 커요. 제가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특히 마지막 대회에서 그토록 허무하게 진 건 충격이 너무나 컸어요. 연습을 하면서 점점 실력이 늘고 안 보이던 주먹이 보이고, 실력차가 컸던 상대를 눕히고 할 때는 '아, 내게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3년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욕심도 생겼는데…."

◆짧고 고됐던 격투기 생활

-사실 프라이드FC에 진출하고 불과 두 달만에 시합에 나왔잖아요. 왜 그렇게 빨리 출전한 거예요?

"하드트레이닝을 3주 정도 했는데 시합 관계자가 무조건 된다고 나가 보래요.(그 사람은 아직 만납니까?) 아니오. 그 사람은 제 돈 1억원쯤 떼먹고 도망갔어요. 경기 운영 방법을 너무 모르는데 아는 기술이 막히니까 막막하더라고요. 또 연습 때와는 달리 몸이 경직되면서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요. 갑갑하고 미치겠데요."

-가장 아쉬운 경기는?

"오브레임과의 경기예요. (그는 지난 6월 알리스타 오브레임에게 36초만에 KO패했다.) 러시아와 일본에서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도 굉장히 실력이 늘었다고 느꼈거든요. 주변에서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어요. 링에서도 해볼만하다고 느꼈고. 그런데 경기 전에 오브레임이 5분만 지나면 힘이 급속도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은 거예요. 그러다보니 공격할 시점에도 '3분만 더 버티자'는 생각만 들고. 머뭇거리니까 바로 치고 들어오더라고요. 난타전을 벌이든, 테이크다운을 하든 뭔가 보여줬으면 후회를 안 했을텐데…."

-종합격투기로 전향한 민속씨름 출신 선수들의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2006년 이후 민속씨름 출신 선수는 최홍만, 이태현, 김영현, 김동욱, 김경석, 신현표 등 6명이다. 이 중 최홍만과 김영현을 제외하면 모두 링 뒤로 사라졌고 이태현 외에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준비 과정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격투기는 엘리트 체육을 경험했다고 해서 1, 2년만에 되는 운동이 아니거든요. 습득 속도와 빠른 이해 능력이 필요한데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죠."

-종합격투기를 하면서 무엇을 깨달았나요?

"운동에 대해 선수로서 가져야할 마인드에 대해 깨달았어요. 우리 선수들은 대개 최고가 안된다고 생각하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외국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운동에 완전히 몰입을 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맹렬하게 연습하고, 모르면 끊임없이 와서 물어보고 시도해보고. 그런 모습이 멋있더군요."

◆은퇴식을 못한 게 한스럽다

-씨름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태어날 때부터 4.9kg이었으니 아주 우량아였죠. 김천 서부초교 4학년때 아버지 친구분의 권유로 시작했어요. 아버지를 따라 멋모르고 구미에 왔는데 김종화 감독님이 덩치에 비해 순발력이 있다며 당장 나오라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감독님이 무서웠는지 길을 가다가도 감독님 목소리가 들리면 숨기 바빴어요. 또 하도 많이 맞아서 김천에서 구미까지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는데 엉덩이가 아파서 자리에 못 앉을 정도였죠."

-현역 시절에 가장 라이벌이 누구였습니까?

"신봉민, 김경수, 김영현. 3명이 가장 힘든 상대였어요. 그래도 제가 가장 목표로 삼았던 건 백승일 선수예요. 가장 친한 동료이면서도 가장 이기기 힘든 벽이었어요. 같은 팀 내에 그런 선의의 경쟁자가 있던 게 제가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994년 1월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서 백승일 선수를 만났을 때 2시간 동안이나 경기를 했잖아요. 무승부로 계체량을 잰 끝에야 제가 천하장사가 됐어요. 그리고 그 해에만 9관왕을 했죠. 그 경기 때문에 '저울장사'라는 오명도 얻었는데, 그 오명을 씻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열심히 했어요."

-씨름 그만둘 때 마무리가 그다지 깔끔하진 못했죠? (당시 그는 소속 씨름단 현대삼호중공업을 나와 종합격투기 프라이드FC로 전향을 했고, 이 과정에서 계약 위반으로 위약금 8천만 원을 물었다.)

"강단에 서기 위해 은퇴를 하는 과정에서 격투기 제안이 와서 전향을 한 건데 오해를 받았어요. 상황이 한번 꼬이니까 매듭을 풀려고 할수록 더 꼬이더라고요. 그 때문에 은퇴식도 못하고 떠난 게 한이에요. 다시 씨름판으로 돌아왔으니 마지막까지 멋지게 하고 꽃다발 받고 눈물 흘리면서 떠나고 싶어요."

◆씨름을 떠나지 않을 것

-왜 씨름을 떠나지 못하는 겁니까? 씨름이 이태현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제가 씨름을 시작했던 자리가 바로 여기거든요. (그가 앉아있던 스탠드와 밑동만 남은 나무를 가리켰다.) 여기 나무가 두 그루 더 있었는데 나무에 대고 매일 어깨 연습하고 자세 연습을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씨름에 눈을 뜨면서 생긴 목표가 '천하장사'였어요. 슬럼프에 빠졌을 때 내가 씨름을 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이태현을 알아줬을까. 내가 이런 영광을 누렸을까하고 생각해봤어요. 자만심이 들고 슬럼프에 빠진 것도 제가 씨름을 잊었던 탓 같아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나요?

"20대 초반요. 그때 제가 허비했던 시간을 다시 다듬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 그때 이런 운동을 더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또 30대가 되고 가정이 있다 보니 해보고 싶어도 못하는 게 많더라고요. 특히 배낭 여행은 꼭 해보고 싶어요."

-남은 목표는 뭡니까?

"씨름 선수로서는 일단 이만기 선배가 세웠던 백두장사 18회 기록을 깨고 싶어요. (그는 이만기와 백두장사 최다승 타이기록을 갖고 있다.) 코치와 감독을 거쳐서 최종 목표는 강단에 서는 겁니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잠시 외도는 있었지만 역시 씨름하면 이태현'이었다는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씨름 선수를 그만둬도 씨름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아요. 씨름을 사랑하고 지켜보면서 살아가겠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이태현은?=1976년 경북 김천 출생. 구미초교 4학년 때 처음 샅바를 잡았다. 의성고 3학년 때 출전한 대회에서 한 대회를 빼고 모두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93년 청구에 입단, 이듬해 1월 부산에서 백승일을 꺾고 천하장사에 오르면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천하장사 3회, 지역장사 12회, 백두장사 18회를 우승했으며 백두장사는 이만기와 함께 최다승 타이 기록을 갖고 있다. 프로전적 630전 472승 158패로 역다 최다승. 2006년 종합격투기 프라이드FC로 이적했지만 3년간 1승 2패의 전적만을 기록한 뒤, 씨름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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