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겨울, 백령도에서 11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왔다. 놀다 보니 첫 휴가는 쏜살같이 지나갔고 집에서 염려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용돈 4만원을 타서는 귀대 길에 올랐다. 인천 월미도에 집합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군함이나 무려 17시간이 걸리는(지금은 4시간) 웅진호라는 여객선으로 백령도 해병대 부대까지 이동하게 된다. 인천~백령도 간 서해 바다는 파도가 워낙 심해서 약간의 풍랑에도 배가 출발을 못 하고 마냥 인천에서 기다려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귀대하던 그날도 파도가 심해 배가 출항을 못 해 파견 부대에서는 휴가병들을 몽땅 외박을 보내줬다. 용돈으로 받아온 돈은 떨어지고 할 수 없이 공짜 고속버스를 얻어 타고 대구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탈영이라도 한 줄 알고 기절초풍하셨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음날 다시 4만원의 용돈을 받아들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날도 여전히 배는 뜨지 못했고 또다시 외박을 나갔고 용돈은 다 써버렸다. 다음날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차마 아버지에게 그 말은 하지 못하고 파도가 세 아직 귀대를 못했다고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는 "어허 클났네. 돈은 있나? 또 다썼붓제" 하시며 걱정하셨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 도저히 돈을 더 달라고 하진 못하고 무일푼으로 서울 남산 벤치에서 낮잠 한숨 자고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고 인천 파견대로 돌아왔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파견대 막사 안에 누웠는데 "박병규! 박병규가 누구야. 위병소 면회 왔다. 나가봐." 서울은 물론, 경기도 일원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누가 면회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시 아까 그 기간병이 들어와 호통을 치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젠 장난이 아니구나 싶어서 위병소로 갔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침에 통화한, 대구에 계셔야 할 아버지께서 위병소에 와 계신 것이었다. "아부지예, 우엔 일이십니꺼."
"오냐. 그래 아침에 니 전화 끊고 나서 갑자기 서울에 볼일이 생기가 왔는 김에 니 얼굴 함 더 볼라꼬 물어물어 왔다. 낮에도 여기 왔다가 아직 안 들어왔다길래 밖에 기다리다가…." 난 위병소 밖으로 나와서 다시 물었다. "아부지예, 갑자기 서울에 무슨 볼일입니꺼." "서울 볼일은 무슨, 볼일 없다. 니 보러 왔지" "괘안타 안 캅디꺼 아부지예."
"니는 괘안은지 몰라도 나는 안 괘안타. 니도 뒤에 장개가서 아들 낳고 살아봐라. 괘안응강. 아들놈이 돈 한푼 없이 서울거리를 인천거리를 돌아 댕기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핀하게 집에 앉아 있을 수 있는강."
나는 무엇인가 말은 해야 되겠는데 말을 잊어버렸다. 아버지는 또 4만원을 손에 쥐여주고 가셨다. 인천 월미도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밤 하루에 내가 흘린 눈물이 아마 내가 그때까지 흘렸던 눈물의 양보다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날 받은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박병규(대구 중구 동성로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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