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불신시대의 생존 기술 '배신'

드라마 영화 서적, '배신 코드' 유행 이면엔…

각박하고 고달픈 현실 때문일까. 사회 전분야에 불안과 불신이 팽배해지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때론 배신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세태. 이를 반영하듯 출판계를 비롯해 영화'드라마에 '배신'이 핫 코드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사기성 배신이 주였다면 최근의 배신은 교묘하고 계략적이다. 심지어 '긍정적 사고', '희망', '노동' , '설득', '윤리학', '경제학' 등 사회의 절대 선으로 여겨지는 관념까지 배신당하고 있다. 세상이 힘드니 조금 독해지고 남을 배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는냐는 투다.

◆배신, 힐링을 대신하다

지난해 힐링 관련 서적이 출판계를 장악했다면 올 들어서는 배신 관련 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아무리 힐링을 강조해도 힐링 되지 않는 현실에 배신감(?)을 느낀 독자들이 배신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 지난해 '긍정의 배신',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까지 미국 저널리스트 에런 라이크의 3부작이 나온 데 이어 금융의 배신, 생각의 배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힐링 관련 책들을 밀어내고 있다. 올 들어서도 속도의 배신, 채식의 배신이 출간된 데이어 배신 관련 만화책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들 책은 현대 정신세계를 지탱해주는 가치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배신자의 향기, 배신의 기술 등은 어떻게 하면 배신을 잘할 수 있을까를 가르쳐 주고 배신을 21C를 사는 진정한 지혜라고 가르치고 있다. 일하거나 놀 때에도 인간관계나 회사생활에서도 지혜로운 배신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영풍문고 관계자는 "지난해까지 힐링 관련 서적들이 대세를 이뤘다면 올 들어서는 배신을 다룬 책들을 찾는 손님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현재 50여 종의 관련 책들이 나와 있다. 분야도 MB의 배신 등 정치 분야에서부터 경제'사회 등 다양화하고 있다"고 했다.

배신을 다룬 영화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해 개봉된 '범죄와의 전쟁', '도둑들'이 '진정한 배신'이 뭔지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줬다. 올 들어서는 경찰이 경찰을 배신하고 조폭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 '신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배신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배신을 당하는 캐릭터, 살기 위해 배신을 하는 모습이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 흥행몰이 중이다.

북한 공작원들의 배신도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 베를린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의 속고 속이는 배신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내뱉은 '사람은 (반드시) 배신해'라는 명대사는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배신의 화신 안방 점령

배신의 화신들은 이미 안방극장을 점령한 상태다. 그동안 안방을 점령했던 것은 사랑과 복수, 막장드라마가 대세였다면 올 들어서는 배신자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BS 월화드라마 '야왕'은 처절하게 사랑하고 배신당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퍼스트레이디가 되려는 다해(수애)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순정 남 하류(권상우 분)의 사랑과 배신을 담았다. 그동안 배신의 주인공이 남자였다면 여주인공이 먼저 배신하고 더 독하게 배신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드라마 '백 년의 유산'은 배신 베틀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악질 시어머니 방영자(박원숙)와 며느리 민채원(유진)이 배신을 밥 먹듯 하며 누가 배신을 잘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조직의 배신은 더욱 복잡하다. '7급 공무원'은 남녀주인공이 스스로 사기를 치지는 않지만 국정원이라는 국가정보조직이 이들을 배신, 사기꾼으로 만들어버린다. 남자주인공은 자기가 배신당한 줄도 모르고 국정원 요원 행세를 하고 끝내 여주공을 향해 총구를 겨누기까지 한다.

사랑보다 강하고 독한 배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예능 프로까지 배신이 핫 코드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방영된 SBS '일요일이 좋다-러닝맨'에서는 배우 이광수가 배신 본능을 자랑(?)하며 동료들을 괴롭히는 장면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케이블 방송이나 종편에서도 배우자에게 제대로 배신당하고 이혼한 이야기, 형제는 물론 자식에게 배신당한 부모의 모습 등이 수시로 전파를 타고 있다.

◆독해지는 배신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은 배신'배반이야'

영화 넘버 3의 주인공 송강호가 말하는 배신은 배신에 들지도 못한다. 훨씬 독해지고 복잡하고 깊이(?)가 있다. 남자가 여자를 배신하고 사랑 때문에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는 고답적인 방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살기 위한 배신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생활 속의 배신이다. 그래서 배신은 더는 죄가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적이며 고단수 전략을 구사한다. 때론 배신이 살기 위한 현명한 수단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금껏 단골로 배신당했던 쪽이 배신자가 되기도 한다. 인기를 끄는 드라마 '야왕'에서처럼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처절하게 배신하는가 하면 백 년의 유산처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채식, 긍정적 사고, 은행, 희망 등 배신의 주체도 다양화하고 있다. 경제학이니 윤리학도 가담하고 있다. 배신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배신할 수 없는 것들까지 배신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독자나 시청자 관람객들도 공감하기 때문이다. 박기웅 문화평론가는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은 이 사회가 요구하고 부추기는 삶의 수준과 도저히 그것에 이를 수 없는 아래쪽 삶의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배신이나 복수는 인간의 오랜 주제였다. 그러나 최근 복잡해진 사회상을 반영, 그 유형이나 주체가 다양화하고 복잡해 지고 있다"고 했다.

◆불안이 불신을 낳고 배신으로 성장

불안의 시대다. 이 불안이 일상이 되고 이는 불신을 낳는다. 이 같은 불신의 씨앗이 배신을 잉태하게 된다. 2040미래 연구소 도건우 소장은 불안과 불신'배신의 악순환이 깊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도 소장은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불안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학업 스트레스에 힘들어하는 학생들, 취업난에 고민하는 청년들, 바쁜 업무에 지친 직장인들,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중년 등 사회적 스트레스가 급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불안에 떨며 일자리, 소득, 집, 연애(결혼), 아이, 희망 등을 하나하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를 유지하던 가치들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있다"고 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배신이 횡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신뢰가 떨어졌다는 방증이다. 새 정부 들어서면서 고위공직자 청문회 등을 통해 청렴하고 도덕적이어야 할 공직자들마저도 각종 부정부패에 연루된 것을 보고 국민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임 교수는 또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이 같은 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다. 남자건 여자건 배신하고 가짜 행세를 하는 건 현실이 그만큼 힘들어졌다는 증거다. 일상생활에서도 신뢰가 깨어지고 배신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 버리고 오히려 처세의 하나로 비치는 것은 잘못된 현실이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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