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뒤집으면 '경력'이 된다. 'evil'(사악한)이라는 영어단어도 거꾸로 읽으면 'live'(살아있는)가 된다. 세상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발상의 긍정적 전환 앞에 극복하지 못할 장애는 없을 것이다. '경북人 세계IN'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매일신문은 첫 인터뷰 대상자로 김석주 뉴욕한인회 역대회장협의회 의장을 선정했다. 역경을 딛고 우뚝 선 자랑스러운 경북인으로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드라마와도 같다. 장애(소아마비)를 딛고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해 기업가로서 크게 성공했고 사회운동가로서도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자존심 강한 소년
그는 1949년 경북 영주에서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소아마비가 찾아왔다. 목발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극심한 장애였다. 부모는 몸이 불편한 그를 강원도 강원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에 있는 외가에 맡겼다. 장애를 가진 아이 때문에 사업이 잘 안 풀린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다. 어린 김석주는 6살인가 7살 때쯤 영주로 돌아왔는데 그제야 부모'형제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영주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어느 날 부모가 이혼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을 다 데리고 서울로 갔다. 서울 생활은 극심한 가난의 연속이었다. 김 의장은 당시의 서울 생활을 암흑기로 기억했다.
그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소년이었다. "형제 중에서도 저는 유별난 아이였어요. 몸이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공부는 제법 잘했지만 불편한 몸으로 체육시험 보는 것이 창피해 체육시험을 보지 않았어요. 결국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지요."
서울 동대문 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보다는 학비 걱정이 앞섰다.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학교도 그만뒀다. 그렇다 보니 그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1년 수료이다. "몸이 불편한 것은 제게 문제가 안 되었어요. 그러나 학비 못 내는 것은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대학은 꼭 가고 싶었는데 돈은 없고 검정고시 공부하는 동안 기술을 배워서 학비를 벌고자 했지요."
◆자동차로 어디든 가는 꿈
그는 전자기술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학원비 걱정은 여전히 따라다녔다. 두 달째부터 상황이 막막했다. 학원조차 포기해야 할 처지였는데, 당시 학원 강사 한 분이 장학금 혜택을 줘 1년 동안 무료로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이 대목에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수십 년 전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 따뜻한 말을 해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불편한 몸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그는 힘들게 했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 인생을 포기하려던 차에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를 보았다. 미국에서 '노 클러치'라는 자동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치자면 오토 트랜스미션 자동차다. "나 같은 장애인도 운전할 수 있는 차가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내가 운전하는 차를 몰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삶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동차 정비 학원을 찾아갔다. 목발 짚은 청년이 나타나 자동차 정비기술을 익히고 싶다고 하자 학원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어이없어했다. 설득 끝에 그는 자동차 수리 기술을 익혔다.
1970년대 초반 그는 청량리에 전파사를 차렸다. 그런데 경찰관이 찾아와 귀찮게 했다. 돈을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는 모른 체했다. 미운털이 박힌 그에게 경찰관은 이것저것 생트집을 잡았다. 참고 참았지만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공구를 지목하며 "장물 아니냐"고 추궁하는 경찰관과 대판 싸우고 말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공무집행방해에 따른 구치소행이었다.
◆역경아 물렀거라!
"나 같은 장애인이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파사도 못 하고 직장은 다닐 수도 없고…. 결국 미국행을 택했지요."
27세이던 1976년, 단돈 600달러를 들고 그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영어도 잘 못했지만 기술이 있으니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스튜디오44'라는 이름의 회사에 취업했다. 대형유통점에서 판매한 전자제품의 A/S 및 반품물건 수리 재판매 회사였다. 그는 죽어라 하고 일했다. 목발 팁이 닳아 한 달에 두 번씩 갈아야 할 정도로 뛰어다녔다. 전자제품 수리는 기본이고 컨테이너 지게차를 직접 몰면서 하역도 하고 직원들을 회사 버스로 출퇴근시키는 일도 도맡았다.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산 경영진은 그를 2년 만에 총괄 매니저로 승진시켜줬다. 회사 규모도 비약적으로 커졌다. 드디어 1986년 이 회사를 인수해 3년간 경영하기에 이른다.
그는 1980년대 말 리사 비퍼(Lisa Beeper)라는 무선통신기기회사를 차리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삐삐로 잘 알려진 무선통신기기 사업이었다. 단말기 값을 대폭 낮추고 가입 신청 서류와 절차를 대폭 간소화한 그의 획기적 마케팅 전략은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졌다.
◆뉴욕의 한인 권익옹호를 위해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와 동화되고자 했다. 백인, 멕시칸, 흑인 등 현지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눴다. 뉴욕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기부 활동도 왕성히 벌였다. 그 결과 뉴욕 퀸즈 자치구(Queens Borough)가 주는 '올해의 미국 시민상'(1996년)을 비롯해 '엘리스 아일랜드 상'(성공한 이민자상'1998년) 등을 받았다.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돼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인들을 한때 멀리하기도 했다. 김석주라는 이름이 뉴욕 사회에 알려지면서 한인 사회에서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그는 뉴욕에 정착한 한인들의 권익 옹호에도 나섰다. 뉴욕사회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권자 등록 운동부터 시작했다. 정치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표'이고 이를 위해서는 한인들의 적극적인 투표권 행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뉴욕한인회장 선거에도 나서 당선됐고 많은 업적을 일궈냈다. 뉴욕 한인 상점과 멕시코 노동자들의 쟁의가 사회문제로 비화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해 해결했으며, 뉴욕의 한인식당에서 개고기를 요리해 먹는다는 한 방송사의 고발 뉴스 때문에 한인사회가 매도되고 있을 때에도 적극 나서 사과 방송을 이끌어냈다.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그는 경상북도 해외자문관회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인 경북도가 세계화를 위해 여러 사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탬이 되겠다고 했다.
그의 나이 64세. 보통사람이라면 은퇴를 생각할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정신력과 육체가 아직 강건해 보였다. 나이가 들었다고 뒤로 앉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적성에 맞다며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제가 겉보기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실패를 더 많이 한 사람입니다. 결국 나 자신이 원인이더군요.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책으로 내고 싶습니다. 특히 실패담을 더 많이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그는 걷는 것, 사람을 껴안는 것 같은 일상적 행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장애인인 줄 모르고 살았어요. 장애인에 대한 동정, 편견, 연민이 없는 미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본받을 만한 사회입니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아마 제대로 못 살았을 거예요. 어릴 때에는 사회에 대한 원망도 많았는데 돌아보면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 사회에 내가 갚아줘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최소 15년은 더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 뉴욕에서 글'사진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프로필
1949년 12월 7일 : 경북 영주군 영주읍 하망리에서 태어남
1976년 : 미국 뉴욕으로 건너감
1976~85년 : 미국 전자제품 AS 및 반품물 수리'재판매 회사 'Studio44' 재직
1986년 : 'Studio44' 인수
1989년 : 무선통신기기회사 'Lisa Beeper' 창업
1992년 : 무선통신사업회사 'Coldwell Communication Inc.' 창업
1995~97년 : 뉴비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1996~98년 : 뉴욕 퀸즈중부한인회 회장
1998~2000년 : 뉴욕 한인유권자센터 이사장
1999~2000년 : 뉴욕밀알선교단 이사장
2001~03년 : 제27대 뉴욕한인회 회장
2011~ : 뉴욕 영남향우회 이사장
◆주요 활동사항
1996년 : 뉴욕 퀸즈 자치구 '올해의 미국 시민상' 수상
1998년 : 미국이민자연맹의 '엘리스 아일랜드 상'(성공한 이민자 상) 수상
1996~99년 : 뉴욕 퀸즈 다민족 문화축제 조직위원회(Multi-Cultural Festival Organization) 창립 및 운영
2000년 : KBS TV '이것이 인생이다' 출연
2001~02년 : 9'11 희생자 돕기 운동 전개(120만달러 기금 조성해 한인 희생자 18명 가족 등에 기금 전달)
2001~02년 : 뉴욕 한인업소 멕시칸 노동조합 노동쟁의 사태 해결
2002~04년 : 뉴욕 업 스테이트 한인식당 개고기 식용 논란 사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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