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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

"사람이 독하기도 하지!" "사람이 밑이 걸기도 하다." 이 두 문장은 모친 김 여사께서 힘이 들 때 푸념처럼 하시던 말씀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여름의 빈집은 쉽게 거미줄이 쳐지고 곰팡이가 핀다. 반면에 빈방이라도 사람이 가금씩만 들락거리면 그렇지 않다. 그만큼 사람이 내뿜는 몸 냄새나, 이산화탄소 등의 입김이 독하다는 방증이다.

주왕산과 달기 약수가 떠오르는 청송에 '주산지'란 숨은 국보급 풍경화가 있었다. 불과 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처음 만난 주산지는 카메라 셔터 소리의 울림조차 조심스럽고, 입김이 떠오르는 물안개의 환상적 장면을 저어할 정도였다. 가을이 되면 연못 주변의 사물들이 스스로 만든 은은한 풍경화를 배경으로 별 바위에서 용이 승천하는 전설이 깨어났다. 계절변화가 너무 아름다워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가 된 이후로, 한적한 풍경과 꽤 잘 어울리는 수상암자 하나가 몇 년 동안 주산지 풍경화의 조연으로 떠있기도 했다. 주산지가 인터넷에 알려지면서 새벽부터 전국 사진 동호인들이 몰려와 북적였고, 사진 전망대까지 만들어졌다. 수없이 밀려드는 관광 인파로 길이 넓혀지고 넓은 주차장도 생겨났다. 사람들의 입김 탓일까? 수양버들이 하나 둘 죽어가고 조용한 연못가가 망가져 긴급 안식년제라도 시행해야 할 형국이다. 삼척 무건리 이끼계곡, 평창 장전리 이끼계곡도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여름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9월 중순이 절정인 꽃무릇 즉 상사화의 3대 군락지는 46만 평의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 고창 선운사이다. 특히 선운사 경내에서 도솔암까지 못 이룬 첫사랑을 위로하듯 상사화가 융단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절정기에 꽃무릇을 보러 가면 사람들의 등산화 발자국이 전쟁터처럼 스쳐간 흔적을 만나고야 만다. 약초, 야생화, 난초 동호회가 지나간 자리도 비슷한 양상이다. 경제적 수준 향상으로 수많은 동호인들이 자연으로 몰려다니고,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어김없이 자연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요란하던 휴가철이 끝나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떠난 뒤 대자연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시들해진 자연보호 운동이라도 다시 활성화해야 할 상황이다. 복지시설에서의 봉사활동도 좋지만 휴가기간 동안 산, 들이나 도로주변에 투척된 일정량의 쓰레기를 주워오면 학생들의 봉사시간을 인정해주는 제도의 신설도 고려해볼 만하다. 사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가 너무 추하다. 이제 휴가문화, 모임문화를 바꿔야 한다. 휴가는 삼겹살을 불태우고 폭주를 해야만 제 맛이라는 '휴삼주'문화도 재고해야 한다. 못했던 독서도 하고, 내년 휴가 계획은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서영환 시인'경제칼럼니스트 seodam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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