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갱년기

아주 오래전 병아리 초년병 의사 시절, 이모는 집안에 유일한 의사였던 나만 보면 하소연을 했다. '속에서 무슨 불덩어리 같은 게 확 올라와서 더워 죽겠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시도때도없이 이러니 이게 무슨 변고인지 모르겠다. 남들은 화병이라는데, 화병이 맞나?' 그때는 아직 많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갱년기 증상이었다. 여성의 일생 중 사십 대 후반부터 오십 대 초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변화로 생식력이 있는 시기에서 생식력이 없어지는 시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난소에서 분비되는 여성호르몬의 생산이 중지돼 나타나는 증상이다. 과거에는 폐경 후 10여 년, 길어야 20여 년밖에 못 살았다.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그런 증상을 호소한다는 건 화병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호사스런 소리 정도로 무시해 버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100세 연령의 시대다. 다시 말해 폐경 후에도 거의 반세기를 더 산다는 것이다. 문제는 생리적 기능이나 신체적 노화는 70세 수명이나 100세 수명이나 비슷하다면 오래 산들 뭣하겠는가? 병상에 누워 수십 년을 지낸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적어도 사는 날까지 남의 도움을 크게 받지 않고 살 수 있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곱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품위를 잃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면 세월 따라 신체가 늙어 가게 두어서는 100세 수명 시대를 누릴 수 없다.

여성 호르몬 분비가 줄면서 피부 탄력은 없어지고 관절은 삐거덕거리며 작은 자극이나 운동에도 쑤시고 아프다. 가슴부터 시작해 얼굴로 확 달아오르면서 붉어지고, 전에 없이 땀도 많이 흘리며, 잠을 잘 못 이루기도 한다. 피부는 윤기를 잃고 까칠해지고, 점막의 위축으로 소변이 자주 마려워지고, 기억력은 떨어지며 눈도 침침해지게 된다. 심리적으로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고,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가족 간의 갈등을 일으킨다.

이렇게 여성의 노화는 폐경과 함께 시작된다. 현대의학은 나이를 먹어도 육체적으로 병 없이 건강하게, 정신적으로는 훨씬 젊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여러 처방을 속속 내놓고 있다. 여성호르몬 대체요법과 적당한 운동, 균형 잡힌 식사, 긍정적 마음에 기초한 활발한 사회활동 등등이다. 오래 살되, 건강하게 살고, 건강하게 살되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젊게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신체활동과 지능활동을 오래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지금 이모님이 계신다면 그 화병을 잘 고쳐 드려서 "우리 조카 최고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박경동 효성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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