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인문학,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만든다

지독한 회의주의 철학이라 할지라도 결국 철학은 삶을 사랑하게 만든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공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규칙으로 타인의 규칙을 압도하는 경쟁의 원칙이 만드는 삶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다름을 겸허히 인정하고 공존의 원칙을 모색하는 삶에 눈뜨게 한다. 오늘날의 스무 살은 경쟁이 강요하는 삶 속에서 피곤하고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 곤고한 삶에 또 하나의 경쟁 이데올로기를 더하고 싶지 않다.(김보일의 '나를 만나는 스무 살 철학' 중에서)

10월 9일,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2013 사회철학 토론 어울마당'이 다시 돌아온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고등학교에서 열린다. '가족사랑 토론 어울마당'이 다소 일반적이고 쉬운 논제를 마련해 토론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던 것과는 달리 사회철학 토론 어울마당은 독서토론과 어울토론을 결합, '언어와 권력'이라는 다소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다.

한글날을 기념하여 '언어'라는 주제를 선택했고,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와 접목하여 '권력'의 문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했다. 읽어야 할 책만 하더라도 김준형의 '언어의 배반',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와 같이 아주 쉬운 책은 아니다. 물론 이런 형태의 기획이 처음은 아니다. 달서구와 서'남구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독도사랑 토론 어울마당', 대구시 전체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했던 '환경토론 어울마당'도 이미 실시된 바가 있다.

토론교육이 단순히 다수의 소통이라는 성격을 넘어 시대정신을 만나고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삶을 그리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다. 표피적인 지식과 문제집의 단편적인 풀이에만 매달리고 있는 고등학생들에게는 정말 단비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내 삶을 걸어갈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질문을 통해 자신이 이미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가능성은 아름다운 선물이면서도 고통이다. 내가 무언가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믿음은 축복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 방향을 모색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는 고통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축복과 고통의 엇갈림 속에서 절망하면서도 희망을 찾아가는 길을 배운다.

토론 어울마당의 효용성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축복과 고통의 가능성을 혼자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풀어감으로써 삶이 결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인문학을 통해 나와 타인의 다름을 겸허히 인정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게 한다. 결국 진정한 인문학은 대단한 지성들의 지식을 배우고 따르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삶에서 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열쇠이다. 사실, 이러한 교육보다 더 실천적인 방향을 지닌 교육은 없다.

최근 대구시교육청 독서정책에 대한 다른 교육청의 문의가 아주 많아졌다. 독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들의 접근 방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어떻게 그런 성과가 나왔으며, 우리도 그런 성과가 필요하니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교육청 안에 있는 계획서나 매뉴얼이 아니다.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철학 토론 어울마당과 같은 풍경, 힘든 교육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아이들과 책쓰기를 실행하고 있는 학교 현장이다. 진실은 문서가 아니라 현장에 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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