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리학자인 윤홍기(69'환경학부 문화지리 전공) 교수를 만나기 위해 오클랜드대학교를 방문했다. 뉴질랜드 명문 국립대인 이곳에서 윤 교수는 유명인사이다. 그는 마오리연구와 동서양 비교 문화지리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데다 그의 부인과 딸도 이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인과 딸이 같은 대학 교수
오클랜드대의 교수 수는 2천 명이다. 이들 가운데 한국인 교수는 7명. 이 7명의 교수 가운데 윤 교수를 포함한 그의 가족이 3명에 이른다. 부인 최인실 교수와 큰딸(둘째)이다. 부인은 1989년 동양학과 한국어 담당 교수로 부임했다. 큰딸은 수학과 교수이다.
오클랜드대는 교수 정년이 따로 없다. 다만, 강의와 연구가 힘에 부친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은퇴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윤 교수는 "한국이라면 벌써 강단에서 물러났을 나이죠. 하지만 동료교수들도 강의를 계속하길 바라는 눈치여서 몇 년 더 강단에 설 생각입니다. 게다가 강의평가 성적이 좋게 나오는 바람에 1학년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대학은 2학년부터 전공을 결정하는데 1학년 때 제 강의를 들은 학생들 가운데 지리학 전공 지원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죠."
윤 교수 부부는 5남매를 뒀다. 자녀 모두 오클랜드대를 졸업했다. 큰아들(맏이)은 호주 시드니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의술을 펴고 있으며, 셋째(딸)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넷째(딸)는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막내는 오클랜드대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연구실에 걸린 낡은 태극기
윤 교수의 연구실에는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다. 그가 1969년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고향'을 한시도 잊지 않기 위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을 건너 뉴질랜드까지 44년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있죠."
고향에서 가져 온 한줌의 흙도 연구실에 보관돼 있다.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날 때 봉지에 담긴 흙을 손으로 매만지며 헛헛함을 달래곤 한다.
윤 교수는 구미시 해평면에서 태어났다. 기자의 고향도 그쪽이라고 하자 환한 웃음을 띠며 반긴다. 일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 대다수가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입니다. 멀리 외국으로, 가까이로는 이웃 마을로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못 잊고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해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따라 서울로 갔다. "우리 가족은 '이촌향도'의 전형입니다. 6'25전쟁으로 집이 폐허가 됐고 먹고 사는 것이 막막해 고향을 떠난 것이죠. 배운 게 없는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어렵게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6남매 가운데 저만 겨우 대학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힘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과 교육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매가 입원해 계실 때 친척들이 병원비에 보태라고 준 돈을 모아 제게 주시면서 '유학 가서 박사가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어매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신 분이지만 스스로 한글을 깨치셨고, 책 읽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당시는 유학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와 함께 유학고시라고 부르던 시절이었죠."(실제 그 시절에는 문교부가 주관하는 유학시험에 통과해야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이어서 돈을 벌며 공부해야 했다. 미국 유타대학교에서 1년 만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버클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에 있을 때 서울대에서 특강을 하던 중 대학원생인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
1976년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오클랜드대에 임용됐다. 윤 교수는 오클랜드대 최초의 한국인 교수이다. "한국인으로서 부부가 취직해서 뉴질랜드에 이민 온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당시 한국 교민은 성공회 신부, 영국군이나 뉴질랜드 군인의 부인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죠."
◆풍수는 '한국인의 지오멘탈리티'
그는 문화지리학자이다. "문화적 현상이 어떻게 자연에 투영되는 지를 연구하는 학문이 문화지리학입니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북유럽의 문화입니다. 뉴질랜드는 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는데 북유럽처럼 겨울 흉내를 내야합니다. 이것이 '지오멘탈리티'(geomentality'땅을 보는 마음)의 사례입니다. 지오멘탈리티가 형성되면 종교적 힘을 갖습니다."
윤 교수는 풍수를 '한국인의 지오멘탈리티'로 해석하고 있다. 지오멘탈리티는 땅, 즉 지리적 환경을 대하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갖고 있는 기성화되었고, 지속성이 있는 정신 상태로서 인간과 자연관의 관계를 제약하는 환경 인식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2011년 한국에서 '땅의 마음'을 출판했다. 풍수사상에서 읽어내는 한국인의 지오멘탈리티를 다룬 책이다. 앞서 출간한 뉴질랜드 마오리족 문화연구서인 'Maori Mind, Maori Land'(마오리의 마음, 마오리의 고향 땅)는 뉴질랜드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비 서양인이 처음으로 낸 마오리족 연구서로서 유럽인은 물론 마오리족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역작이었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와 환경 ▷한국의 풍수사상이 경관에 미치는 영향 ▷아시아인의 이민 성향 ▷유럽문화와 동양문화 등을 주제로 SSCI급 논문을 비롯해 총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가 집필한 저서와 논문은 세계적인 명문대 도서관 장서목록에 등록돼 있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사이트에 접속해 '윤홍기'를 검색하니 10건의 목록이 나타났다.
윤 교수의 명성이 국내에도 알려지면서 그는 서울대, 고려대에서 몇 차례 강의를 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교수나 학자들을 대상으로 특강하는 기회를 가졌다.
◆고향의 그리움, 시(詩)로 녹여
오랜 외국생활에서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부모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책 한 권을 보여줬다. 1997년에 한국에서 출판된 '고향이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자작 시집이다.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한 줄 두 줄씩 썼던 것들입니다. 그렇게 몇 줄 쓰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힘이 솟고, 정신이 듭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소박한 시어로 엮어낸 그의 시를 읽은 한국의 동창생들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윤 교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 편지들을 종종 꺼내 읽는다고 한다. 소년의 감수성이 살아있다.
그의 시집에서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시 한 편을 옮겨본다.
"아배가 막노동을 하셔서/ 대학간다는 것이 억지인데/억지로 대학을 갔다./ 아배가 기뻐하셨다.// 아배가 중풍에 드셔서 유학을 간다는 것이 억지인데/ 억지로 유학을 갔다./ 아배가 슬퍼하셨다.// 영어를 한다는 것이 억지인데/ 영어를 했다. 워킹(walking)하고 워킹(working)을/ 구별하라고 한다./ 아무리 입을 삐뚝삐뚝해도/ 안 된다./ 아무리 혀를 꼬불꼬불해도 안 된다./ 억지였다./ 아무래도 억지였다, /영어를 한다는 것은,// 영어를 해야 밥벌이를 한대서 억지로 혀를 굴리고/ 억지로 안 들리는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외국말로 공부하는 것도/ 억지였는데/ 외국말로 외국 대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더한 억지였다.//
('억지선생' 중에서, 1985년 8월 26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글'사진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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