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철도, 미래를 달린다] ①대한민국 철도의 역사

수탈의 시대 넘어 국가 경제 성장 동력으로 '칙칙폭폭'

1899년 노량진 역에서 국내 첫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이에 앞서 기공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국내 관련 인사들과 정복을 입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어서 일본 자본에 의해 경인선이 건설됐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노량진 역에서 국내 첫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이에 앞서 기공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국내 관련 인사들과 정복을 입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어서 일본 자본에 의해 경인선이 건설됐음을 알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철도는 국가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형태의 관광 열차를 운영해 국민의 여가 및 관광자원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철도는 국가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형태의 관광 열차를 운영해 국민의 여가 및 관광자원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철도는 외국인 손에 의해 시작되고 일본 수탈의 도구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선진국과 다르다. 지금은 철도가 운영 중인 전 세계 130여 개국 가운데 이용률이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탈의 역사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미래를 열고 있는 철도에 대해 매일신문은 출범 10주년을 맞이한 한국철도시설공단(이사장 김광재)과 함께 앞으로 걸쳐 국내 철도산업의 변천과 미래 모습을 점검한다.

◇글 싣는 순서

1. 대한민국 철도의 역사

2. 미래를 바꾸고 있는 고속철도

3. 세계 속의 우리 철도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우리 철도

'화륜거의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다.' 1899년 9월 19일 독립신문은 국내 최초로 건설된 서울 노량진-인천 제물포 간 경인선을 달리던 열차를 보고 이같이 표현했다. 무척이나 웅장하면서도 엄청 빠른 속도를 내는 것처럼 묘사돼 있으나 당시 열차는 시속 20㎞/h에 불과했다. 이 열차는 국내 첫 증기기관차로서 총연장 33.2㎞를 하루 두 번 왕복했다.

경인선은 일본에 의해 건설됐다. 대한제국 말기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러파 내각이 성립되고 러시아가 한국에서 각종 이권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다른 열강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이권쟁탈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京仁) 간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모스는 본국에서 자본주를 찾다가 실패하자 3년 뒤 권리를 일본에 팔아넘겼고, 그해 9월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京仁鐵道株式會社)를 만들어 경인선 건설에 나선 것이다.

이후부터 철도를 통한 일본의 본격적인 수탈 작업이 진행됐다.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은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철도가 필요했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됐다. 한반도의 남단 부산으로부터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는 간선이 만들어졌고 서울~신의주, 마산~삼랑진 경의선 철도도 개통됐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통감부(統監府) 안에 철도관리국을 설치하고 경인'경부'경의'마산선을 직접 장악했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철도관리국은 조선총독부 내 철도국으로 이관돼 식민지 경제적 착취를 위하여 철도망의 확장에 착수했다. 1914년 호남선, 1928년 함경선을 완공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은 대륙과의 연락망을 확충하기 위하여 국경지대 철도 확장 작업에 착수했고 1937년 혜산선(惠山線), 1939년 평원선(平元線)'만포선(滿浦線)을 완공했다. 조선총독부가 시작한 수탈을 위한 철도 건설은 1945년 8'15광복 당시까지 총 길이 6천362㎞에 달했다.

◆전쟁으로 국토와 함께 잘려나간 허리

경기도 연천군 최북단에는 증기기관차 한 대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와 함께 전시돼 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군 소장을 구하러 대전을 지나가다 폭격을 맞은 열차다. 작전은 실패했고 기관사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열차는 오늘도 북녘을 바라보며 북한 측에 철로를 놓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휴전 선언으로 38선 기준 양분된 남한 철도는 국토가 그랬던 것같이 허리가 잘려나갔다. 6천㎞에 달하던 철길도 2천642㎞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철도 건설'운영의 주체도 우리가 아니었다. 철도 운영권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관됐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청 교통국이 발족돼 38선 이남 철도행정을 담당하고, 이듬해 남한 소재 사설철도 및 부대사업 일체를 국유화했다. 1946년 공산계열에 의한 철도 총파업 등 혼란을 거듭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교통부가 발족돼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철도업무를 이양받게 됐다. 하지만 국내 철도 이양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 중 전시수송체제로 바꾼 철도는 국제연합(UN)군 산하로 넘어갔으며 철수 작전에 참가해 200여만 명의 피란민을 수송했다.

전쟁의 포화가 걷히자 전후 복구 작업의 일환으로 철로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1955년 6월 1일 UN군이 가졌던 철도 운영권이 한국정부로 완전히 이관됨에 따라 한국철도는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됐다. 당시 주역은 '통일호'였다. 증기와 디젤기관차가 견인하는 통일호는 서울-부산 420㎞ 구간을 9시간 만에 주파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교통수단이었다.

1961년 5'16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시대에 발을 내민 철도는 1962년 1월 철도법(鐵道法)이 시행됨으로써 법적 체계와 안정적 발전의 기틀이 다져진다. 1963년 9월 1일 철도청이 발족되고, 확대되어 가는 수도권의 교통망의 일환으로 경인선 복선개통이 1965년 이뤄졌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경인'경수'경부 등의 잇단 고속도로 개통으로 자동차 교통의 정면 도전을 받게 된 철도는 양적인 발전에서 속도와 서비스를 종합한 질적인 발전으로 힘을 기울기 시작하였다. 1967년 비둘기호가 도입됨과 동시에 증기기관차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효율성이 높은 디젤기관차가 전면 확대 배치됐다.

이후 독립회계로 경영을 시작한 철도는 시설자금 부족으로 많은 양의 외국 차관을 들여오는 데 공을 세웠고 보다 양질의 수송용역을 생산해 냈다. 1969년 '관광호'라는 열차가 도입됐는데 서울-부산 구간은 시속 120㎞의 속도로 4시간 35분 만에 주파했다. 관광호는 현재는 구형이지만 당시로서는 최고급이었던 새마을호의 전신이다.

◆국가 산업 대동맥으로 성장

1970년대 말 급속한 경제성장과 향상된 국민 생활에 발맞춰 철도도 진화해 갔다.

1972년 철도청에서 태백선 전철화로 그 노선에 들어갈 전기기관차를 프랑스 알스톰사로부터 도입했다. 도입량 수는 90량이었으나 향후 4량을 국산 제작해 총 94량을 국내에서 운행했다. 이 기관차는 엄청난 마력 덕분에 좋은 등판력을 지녀 수십 년간 화물차로 요긴하게 쓰였다. 이와 함께 1974년 수도권 1호선에 전기동차도 도입된다. 일본에서 제작한 수도권 1호선 최초 도입차량은 현재 2호선 신정차량기지 유치선에 2호선 최초도입분과 함께 유치 중이다.

1977년 수도권 열차집중제어장치(CTC)의 설비가 갖춰지고 주요 선에는 냉난방 설비가 된 우등열차가 운행된다. 서울역 지하역에 처음으로 승차권 자동발매기가 설치되고 경부선에 콤파트(독실) 침대차가 도입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차량의 국산화에 초점이 맞춰져 완전제품은 아니지만 기관차 및 각종 차량을 자체 생산하게 됐다. 국산 우등전기동차를 태백'영동선에 취역시키고 수요증대에 따라 원활한 수송을 위해 충북선과 호남선의 복선화 작업도 이때 이뤄졌다.

1983년에 무궁화호가 제작되면서 한국철도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새마을, 무궁화, 통일, 비둘기 등 4개 열차로 나뉘어지게 된다. 무궁화호는 당시에 우등열차로 불리면서 1984년 제작된 디젤동차 NDC와 함께 많은 인기를 끌었다.

88올림픽을 앞둔 1987년 철도청은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5량의 새마을호 2개 편성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최고급 관광 열차를 운영했다. 열차는 새마을호 객차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유선형으로 제작된 획기적인 디자인이 일품이었다. 지금도 운행 중인 하루 100만원에 달하는 최고급 관광열차 '해랑'의 전신이다.

수도권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86년 성북~의정부 사이 복선전철을 개통됐고, 1988년 금정~안산 사이 안산선, 1993년 사당~인덕원 사이 과천선, 1994년 사당~인덕원 사이 과천선, 수서~오리 사이 분당선 복선전철이 연이어 개통됐다.

박상전기자 miky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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