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인생 전체가 TV 쇼였던 영화 '트루먼 쇼', 이 영화는 PPL(Product Placement : 영화, 드라마 등에 특정 제품을 등장시켜 홍보하는 것)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짐 캐리는 이웃들의 이상한 행동을 봤을 때 이 PPL쇼를 눈치챘어야 했다. 친절한 노신사가 치킨 브랜드 상표 쪽으로 그를 밀어내 인사하고, 고민에 빠진 짐 캐리한테 아내는 "오, 당신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요. 그렇다면 유기농 코코아를 마셔보는 것은 어때요? 인공 감미료를 넣지 않았어요!"라며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코코아 통을 들고 웃으며 설명한다. 여기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은 TV에 노출하기 위한 광고 제품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PPL 수위가 트루먼 쇼와 비슷하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는 드라마 속 PPL이 제작자의 편집권과 시청자 주권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 감추지 않는다, 대놓고 광고한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지나치는 한 남자. 창가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는 남녀를 발견한다. 식당 주인이 등장해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네가 원하는 거 다 만들어줄게. 메뉴판에 없는 거라도 좋으니까 다 주문해"라고 말을 건다. 식당 주인은 "이번에는 코스 요리다. 목살 스테이크, 크림 리조또, 파스타, 한라봉 에이드"라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메뉴를 설명한다. 협찬사인 외식업체의 메뉴인 '한라봉 에이드'를 노골적으로 광고하는 것이다. 가게 앞에서 인사할 때도 신 메뉴 배너 광고와 간판이 선명하게 클로즈업된다. KBS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의 한 장면이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도 탄탄한 구성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과도한 PPL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조인성은 '탄산수 전도사'다. 집에 도착하면 탄산수부터 마시고,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차례로 탄산수를 만들어 대접한다. 공효진과 사랑싸움도 항상 탄산수 제조기 앞에서 한다. 물컵을 빼앗고, 빼앗기며 '이 탄산수를 마시면 당신들도 우리처럼 예쁘게 사랑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 드라마를 즐겨봤다는 직장인 김미애(28) 씨는 "탄산수 제조기 업체가 드라마 협찬사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주인공이 싸울 때도 항상 탄산수 제조기 앞에서 한다"며 "또 조인성은 드라마 맥락과 상관없이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제습기부터 켠다. 드라마 내용은 진짜 좋았는데 과도한 PPL 때문에 흐름이 끊겼다"고 꼬집었다.
최근 드라마에는 에피소드에 협찬사 제품이 그대로 등장하는 노골적인 PPL이 자주 등장한다. 단순 상표만 노출하는 PPL보다 관련 에피소드가 들어가면 광고 단가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KBS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모두 협찬사와 엮여 있다. 막내아들 달봉(박형식)이 일하는 곳은 협찬사인 돈가스집, 차순봉의 조카인 중백(김정민)은 치킨집을 운영한다. 억지로 끼워넣은 협찬사 에피소드로 드라마 맥을 끊기도 한다. 이 집 며느리인 권효진(손담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가족들이 갑자기 먼 곳을 쳐다보게 한 뒤 "우리 가게 간판 어때?"라고 물으며 치킨집 로고가 화면에 나오고, 손담비는 "깔끔하게 한눈에 캐릭터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잘 돼 있는데요?"라며 파워블로거 같은 답변을 날린다. 치킨집 광고인지, 드라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 한국의 PPL, 어떻게 가능해졌나?
20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방송 환경에서 PPL은 강력한 규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2010년 1월 방송법 시행령 개정으로 규제가 완화됐고, PPL을 '신유형 광고'로 편입하면서 지상파방송 드라마 속 PPL이 가능해졌다.
방송사들의 광고에서 PPL 수익은 해마다 늘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송호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KBS와 MBC의 PPL 매출액을 공개했다. 송 의원이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KBS와 MBC의 PPL 총액은 2010년 17억3천500만원에서 지난해 191억2천300만원으로 11배 증가했다. PPL 광고주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PPL이 최초로 도입된 2010년에는 28개 프로그램, 32개 광고주가 있었지만, 지난해에는 62개 프로그램, 180개 광고주가 참여해 몸집이 커졌다. 송 의원은 "PPL 매출은 급증하고 있지만 제작 환경은 열악해져 콘텐츠 경쟁력이 하락하고 있다"며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는 장기적 관점에서 프로그램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PPL을 관리,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속 PPL 업체들이 대기업 일색인 것도 문제다. 유명 신사복과 아웃도어 브랜드, 대기업 화장품 등 이미 TV 광고 속에 자주 등장하는 기업들이 PPL까지 점령했다. 중소기업들은 협찬 비용도 고가인 데다 비용을 마련한다고 해도 대기업들이 선점한 주요 프로그램 PPL에 끼어들기 어렵다.
과도한 PPL은 콘텐츠의 질을 낮출 뿐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자의 편집권도 위협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방송사의 프로듀서는 "종편(종합편성채널)의 출연으로 각 방송사의 광고 매출이 하락하고, 방송사 경영이 악화됐다. 이는 종편이 개국하고 방송사간 광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상됐던 문제다. 광고 수입이 줄어들어 드라마 제작 환경이 열악해지니 드라마 PD들이 어쩔 수 없이 PPL을 선택하는 것"이라며 "불필요하고 관련성이 없는 상품과 정보를 극에 삽입해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하고, 프로그램 질을 낮추는 것도 문제지만 프로그램 제작 재원에서 PPL 광고 비중이 커져 제작자가 광고주에게 휘둘리고 '방송 주권'이 광고주에게 넘어가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기고] 박정희대통령 동상건립 논란 유감…우상화냐 정상화냐
이재명의 추석은?…두 아들과 고향 찾아 "경치와 꽃내음 여전해"
홍준표 "김건희, 지금 나올 때 아냐…국민 더 힘들게 할 수도"
정청래, 다친 손 공개하며 "무정부 상태…내 몸 내가 지켜야"
‘1번 큰 형(러시아)과 2번 작은 형(중국)’이 바뀐 北, 中 ‘부글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