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흐려지더니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 목적도 없이 집을 나와 빗길을 걸었다. 근교로 나가서 연록의 어린잎들이 비를 머금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 그저 귀여워 웃음으로 다가갔다. 마치 엄마의 모유를 빨아들이는 아가의 입처럼 쭉 내민 잎들이 앙증맞기만 하였다. 어미의 젖같은 봄비를 들이키고 하늘을 향해 바라보는 그 순간이 키가 되는 가 보다. 봄비를 맞게 되면 더욱 쑤욱 커 올라오는 연록의 잎들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세상을 투명화 시켜준다. 겨울의 찬 기억들을 떨쳐버리고 올라오는 잎들의 기운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봄비가 내리면 우산을 받쳐 들고 자주 강가를 거닐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는 데 누구를 마중 나가는 사람처럼 마음만 들뜨던 날, 우산을 받쳐 들어도 옷은 젖어왔다. 차려입은 나팔바지 가랑이가 점점 젖어 올라와도 그냥 비를 맞고 걸어가는 시간이 좋았던 시절이 물씬 떠오른다. 비 젖은 길을 걸으면 생각도 젖어 들어 자유로운 자신임을 즐겼다. 일상의 잔상들이 내 마음 안에 조용히 내려와서 제자리로 찾아가면 미지근한 일상마저도 내게는 소중한 하루였음을 알았을 때, 몰래 흘린 눈물은 봄비 속에 감추어져 젖은 길을 더욱 젖게 해 주었다.
자란다는 것은 기쁨이었지만 자란 만큼의 시간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고는 멍해 버린 가슴앓이도 봄비 오는 날에 했었다. 누군가를 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가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일 게다. 봄비 오는 길목에 서서 낙엽 되어 가버린 생각들을 모아봤다. 아직 어린잎 밑동 주위에는 지난해 자란 풀들이 말라 엉켜져 있었다. 어린 싹들은 그것들의 보호 아래 자랐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지. 겨울 동안 자신을 따뜻이 감싸준 마른 잎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될 즈음은 아마도 제 자신이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일 것이다. 그 품안에서 한 해의 꿈을 꾸었을 어린 잎들은 봄비를 머금고부터 새로운 한 해를 향해 커 올라오는 것이리라.
내 생각을 키워 준 봄비는 나와 어린잎들에게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선물로 뿌려줬다. 어린 날, 보리밭을 오르고 내리던 종달새처럼 목청껏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던 일도 나의 잃어버린 시간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내 삶의 귀중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고운 보자기로 묶어 놓고, 봄비를 맞으러 가는 해마다의 봄날에 보자기를 다시 풀어 새 이야기를 담아 볼 작정이다. 봄비 따라 거닐면 생각이 빗줄기를 타고 먼 데까지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남은 봄날도 봄비 속으로 젖어 드는 시간을 찾아 거닐고 싶은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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