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만경관(萬鏡館)

1960, 70년대만 해도 '만원사례'나 '기도'라는 말은 극장가의 일상용어였다. 극장 입구에서 표를 받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말 '기도'(木戶)는 원래 정원 출입구 등의 외짝 여닫이문, 흥행장 출입구나 입장료를 뜻한다. 일제강점기, 영화관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이후 극장'유흥업소 입구를 지키는 사람의 뜻으로 굳어진 것이다.

흥행이 성공해 관객이 꽉 차면 극장 측은 감사 표시로 '만원사례'를 내걸었다. 이 용어도 흔히 알고 있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극장 입구에 '만원사례'(滿員謝禮)를 써 붙이는 것 외에 극장주가 인근 극장에 돈봉투를 돌리는 게 당시 극장가의 관례였다. 말만 하고 입을 싹 닦는 게 아니라 회식비 정도의 촌지라도 돌려 서로 관계를 돈독히 한 것이다.

1970년대 대구의 극장 수는 무려 31개였다. 한일 만경관 아카데미 아세아 대구 자유 제일 등 개봉관만도 7개다. 이외 송죽 중앙 신도 신성 대한 대도 동아 부민 사보이 오스카 수성 미도 남도 코리아 칠성 등 시내 곳곳에 재상영관이 불을 밝혔다. 1980년대 컬러TV의 등장으로 먼저 '3류 극장'으로 불렸던 재상영관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1990년대 복합상영관의 공습에 개봉관마저 차례로 문을 닫으면서 옛 극장의 자취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영남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만경관'(萬鏡館)이 개관 96년 만에 문을 닫는다. 만경관은 최근 홈페이지에 '4월 30일 영업을 종료합니다. 그동안 애용해주신 모든 고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고 알렸다. 개관 당시 이름을 그대로 지켜온 국내 최고(最古)의 극장, 근 100년의 세월을 버텨온 향토 극장의 고별사다.

만경관은 1922년 이재필이 토종 자본으로 세운 대구 최초의 극장이다. 대구 최초의 공연장인 태평로 '니시키쟈'(錦座)에 1907년 영사기가 처음 들어온 때로 치면 15년 뒤다. 국내 최초의 극장 '협률사'(1902년)나 첫 상설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1910년)보다는 늦지만 지방 극장으로는 녹록지 않은 연륜이다.

폐관 후에도 옛 자취가 아직 남아 추억이라도 되살려주는 신암동 신도극장을 제외하면 단관(單館) 극장은 이제 거의 찾기 힘들다. 봉덕동 남도극장과 남문시장 건너 대한극장, 자갈마당 인근 동아극장, 비산동 오스카극장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침산동 코리아극장도 아파트 단지로 바뀌면서 몇 해 전 헐렸다. 만경관이 영업난으로 폐관을 결정한 것은 대구 시민에게는 또 하나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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