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으로 온 나라가 뜨겁다. 공감과 지지의 목소리가 높지만 갖은 의혹과 우려에 위축되기도 하는 것 같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도 없이 비난에 시달린다. 이에 미투 운동 자체에 대한 비판과 회의의 견해도 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피해자의 '주장'만으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객관성을 유지하고, 피의자와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하며, 절차를 통해 진실이 밝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짚어 봐야 할 점은 피해자가 긴 침묵 끝에 왜 스스로의 신분을 노출하면서까지 과거를 말하는가이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열다섯 살의 유정은 사촌오빠의 성폭행 사실을 엄마에게 털어놓지만, 처신을 잘못한 자신에게 오빠가 짓궂은 장난을 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성폭행은 없었던 일로 묻혔으며, 유정은 홀로 상처를 감당해야 했다. 그녀는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른이 넘도록 치유의 시작도 못 한 영혼은 여전히 열다섯에서 맴돌았다. 결국 유정은 가족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게 돌려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다.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하였을 거라는 편견과 잘못된 성 관념, 주변의 비겁한 대응이 사건 당시의 법적 조치를 막은 것이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일만이 아니다.
또 다른 원인은 집단주의이다. 학창 시절, 작은 잘못에도 학급 전체가 눈을 감고 벌을 서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어깨동무를 하고 앉았다 일어서다를 반복하며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쳤다. 취직한 친구들은 회사의 명령에 순응했고 내부의 문제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집단주의가 체화된 우리들은 조직 내의 성폭력을 묵인했다. 분위기가 무안해질까 봐, 예민하게 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별것 아닌 일을 확대한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모른 체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가십 거리가 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현재 미투 운동은 권력형 성폭력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실상 모든 성폭력은 힘의 불균형에 터 잡은 것이다. 성폭력은 불평등 속에서만 일어나고, 그 때문에 피해자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다. 증거 수집은 고사하고 상황을 모면하는 것도 어렵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소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낀다. 그간 만나본 성폭력 피해자들은 정서불안, 수면장애, 우울, 위축감 등을 호소했다. 가족과 주변의 도움을 받아 신고에 이르는 경우는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증인석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저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용기를 내어 법정에 나왔습니다." 이 말은 내게 무력감, 외로움, 고단한 싸움의 고통 속에서의 절규로 들렸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피해의 폭로가 아니라 공유에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동일한 피해를 막기 위해 연대하는 마음이 모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야 과거를 이야기하느냐는 비난은 부적절하고 부작용에 대한 우려는 성급하다. 더 이상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인생을 건 고백이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성적 자기 결정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호되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것이다.
춘분에 때아닌 폭설이 내렸다. 3월 하순의 대구에서는 111년 만에 가장 많은 적설량을 보였다고 한다. 우산을 써도 옷자락과 신발이 젖었다. 보행은 불편했으나 긴 겨울 가뭄의 해소를 생각하면 감수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해묵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눈비 뒤에는 따뜻한 햇볕과 함께 새싹이 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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