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근대문화유산과 나눈 대화] <4>문경 가은역

산업화시대 꿈의 통로, 지금은 커피향 쉼터

가은, 마성을 연결한다는 뜻으로 1956년 은성역으로 불렸다. 가은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59년이다. 현재의 역사는 1955년 신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은, 마성을 연결한다는 뜻으로 1956년 은성역으로 불렸다. 가은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59년이다. 현재의 역사는 1955년 신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은성역 모습.
1956년 은성역 모습.

탄광 마을 석탄 수송 역할

아이들은 광장이 놀이터

폐광 2년 만에 역도 폐쇄

지난해 카페로 탈바꿈

한달 평균 900여명 발길

유유히 산 너머 흘러가는 구름을 지켜보며 허벅지 근력 꾹꾹 짜내 앞으로 나가는 레일바이크의 자리는 원래 대한민국 땔감의 인식 전환을 가져온 석탄의 몫이었다. 지금은 폐선이 된 가은선, 문경선을 따라 석탄은 전국으로 향했다. 검은 석탄은 청운의 빛이자 장밋빛 미래였다. 그랬기에 문경 가은역은 '꿈의 통로'였다. 까까머리 중고생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유학 통로였고,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찾는 창구가 이곳이었다.

구랑리역, 진남역, 불정역, 주평역, 점촌역까지 이어지던 40분여의 비둘기호 승차는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장밋빛 미래'라는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던 가은역은 광장마저도 디즈니랜드에 맞먹는, 이곳 아이들의 놀이동산이었다. 탄광 마을이었기에 온통 검었던 가은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하얀 벽의 건물 주변을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녔고,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이곳 토박이인 임분남(51) 왕능 3리 부녀회장은 "운강 이강년 추모비석이 랜드마크처럼 역 광장에 솟아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주었다. 중년이 된 우리들의 꿈에 한번씩 나타난다"고 했다.

만남의 광장 역할은 숙명이었다. 오전 7시 15분 출발하는 첫 기차, 밤 9시 도착하는 마지막 기차까지 하루 7차례. '게이트웨이'가 열리는 시각이 되면 만나려는 각자의 설렘은 하나로 묶여 수다로 폭발했다. 잦은 연착으로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이들이 모인 자리는 이집저집의 이런 사정, 저런 자랑거리를 듣고 퍼뜨리는 토크쇼 경연장이 됐다. 여가문화의 부실을 책망하며 열린 간이 도박장 역할을 떠맡기도 했다.

풍요의 시대가 저물자 가은역은 탈출구로 바뀌었다. 은성탄광이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문을 닫자 석탄 수송로였던 9.6㎞의 가은선도 운명을 함께했다. 1993년 폐광 직후 가은읍에는 나가는 사람만 있을 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은정집, 열차집, 상주집에서는 "여기, 대포 한 잔 더"라던 단골들의 목소리가 끊겼고 백년장여관 등 숙박시설도 문을 닫았다. 햇님다방, 꿈다방도 눈부신 꿈을 싸매고 사라졌다. 유령도시가 오래된 습관처럼 보여준 '정리의 수순'이었다.

2만5천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5천 명 아래로 떨어졌다. 당시 철도청은 가은역의 폐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철도청에서 수요 조사를 한다는 말에 가은읍민들은 더 열심히 열차에 올랐다. 가은읍민들에게 가은역은 여전히 꿈의 통로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너무도 많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1995년 3월 31일 오후 7시 20분 기차가 마지막이었다. 그해 7월 폐역이 됐고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016년 12월까지 21년간 가은역은 비어 쓰레기와 연탄재가 뒹굴었다.

마지막 가은역 역무원으로 근무했던 황동철(56) 옥산역장은 "가은의 영욕을 철길에 실어나르던 곳이 가은역이다. 역사 곳곳에 가은 주민들과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록이 묻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가은역이 영 잊히진 않았다. 1999년 주흘산, 백화산 등을 찾는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등산열차가 잠시 운행되기도 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관광지로 제법 자주 오르내리며 존재감을 이어오다 지난해에는 카페로 환생했다. 방문객도 제법 많다.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2천800명이 찾았다. 열차 대신 자가용에 실려온 관광객들이 옛 가은역 광장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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