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아! 판문점

우리 조상들은 태생적으로 착했다. 백성을 매몰차게 버린 군주조차 민초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한양을 버리고 파천길에 오른 선조에게도 백성들은 충(忠)을 다했다. 파주를 지난 선조의 어가(御駕)를 임진강이 가로 막아섰다. 임금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대문을 뜯어내 널빤지 다리를 놓았다. 이후 이 마을은 '널문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널빤지 문으로 다리를 만든 마을'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전란(戰亂)으로 임금의 피란 기억을 간직한 곳 널문리는 그로부터 359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951년 6'25전쟁 휴전을 준비하던 UN군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을 회담 장소로 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널문리이다. 널문리에 있던 작은 가게 앞 콩밭에 천막을 쳤는데 장소 이름을 영어와 중국어로 옮기기가 마땅찮아 쓴 표기가 '판문점'(板門店'널문리 가게)이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의 아픔과 대치 상황을 침묵과 긴장감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지금의 판문점은 널문리 가게로부터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비무장지대(DMZ) 접경 지역에 동서 800m, 남북 600m에 걸친 장방형 땅인데 판문점의 공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다.

세계의 첫 이목을 끈지 67년이 흐른 지금 판문점은 다시금 세계 역사의 큰 분수령 위에서 주목받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남북 정상회담이 이곳 판문점에서 열렸다. 북한 핵무기 개발로 인한 군사적 충돌 위험이 백척간두에 처한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 장소로서 판문점이 전해주는 의미는 너무나 각별했다.

남북 정상회담은 들어가는 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미 정상회담이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와 판문점 두 곳이 유력하다는데, 역사성으로 보나 정치적 효과로 보나 판문점이 우월해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판문점을 선호한다는데, 백악관 보좌진들과 미국 국무부'국방부 관료들이 이를 뜯어말리고 있다고 한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와 날짜가 결정됐다고 해놓고도 미국이 발표를 늦추고 있는 것은 이와 관련한 갈등이 미봉합 상태이며 최종 결정에 변수가 아직 남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유추를 하게 한다.

회담 결과만 좋다면야 싱가포르이든, 판문점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혹여나 북미 정상회담 추진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미국 주류 세력들의 심사가 '판문점 비토'로 나타나고 있다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를 뺀 대다수 미국 정치권 및 군산복합체와 한반도 주변 열강들이 남북 평화체제 구축을 마뜩잖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더구나 북한 내부에도 평화체제 구축에 반대하는 군부 세력들이 있을 텐데 김정은이 이들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북핵 폐기와 남북 평화 도래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어차피 북핵의 완전한 폐기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격랑 속에 휘말릴 공산이 크고 그 완충지대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평화 체제 구축이 선택지가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목적지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왕지사 트럼프와 김정은이 회담한다면 판문점에서 만나는 그림을 그려본다. 현실적으로 난관이 첩첩산중인 북핵 폐기 이슈에서 북미 판문점 회담은 하나의 푸른 신호등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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