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남북공동조사

대구 광문사 문회에서 발의된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대구민의소 주최로 대구 북후정(北亭)에서 첫 대회가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일주일 뒤 대한매일신보는 2월 28일 자 신문에서 평안도 국채보상 서도의성회 설립 소식과 함께 국채보상 취지문을 상세히 싣고 있다. 국채보상 서도의성회는 취지문에서 '토지가 있은 뒤에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는 뒤에 나라가 있는 것은 세계만방의 당연한 이치'(夫土而後有民고 有民而後有國은 世界萬邦之常理也)라고 밝히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천명했다.

신문에 의하면 서도의성회에 이어 3월 21일 평양을 비롯 정주군, 통진, 중화군, 철산, 의주 등 평안도에서만 10여 개 국채보상소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또 황해도 수안, 재령군, 은진, 은률군, 옹진 등과 함께 함경도 함흥군, 원산항, 흥원군, 영흥 등 10여 군데에서도 국채보상소가 연이어 생겨났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안중근 의사도 국채보상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되어 부인과 가족들의 장신구 등을 모두 헌납하기도 했다. 이처럼 111년 전에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북한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140여 건의 국채보상 취지문과 권고문 중에는 50여 건이 북한지역에서 발표된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의연금을 내는 데도 적극적이어서 전체 의연금의 23% 정도를 차지한 서울에 이어 경북과 황해도, 평안남도가 각각 10%씩으로 그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2천만 국민들이 석 달간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으로 일본에 진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국채보상운동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구국운동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전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국민통합이었고 근대국가를 향한 국권과 민권의 자각 운동이었다.

다행히 대구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등의 노력으로 국채보상운동은 지난해 말 드디어 유네스코 세계기록물 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룩, 국민적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채보상운동의 연구나 기록물 발굴 조사 등은 북한에까지 미치지 못해 큰 아쉬움으로 남았던 게 사실이다. 대구시는 이에 따라 중국의 학자 등을 통해 북한지역에 대한 국채보상운동 자료 발굴 등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남북 정상회담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 나오면서 남북 간 다방면의 교류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남북공동 발굴 조사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대구시는 이미 조성해둔 50억원의 남북교류협력기금 등을 적절히 활용하는 구상까지 제시하며 다시 북한지역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발굴 조사를 발 빠르게 추진하고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의를 생각하면 적절한 조치며 대응이다. 기울어져 가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당시 2천만 국민들은 남녀노소와 신분 지위를 초월해 두 팔을 걷고 나서며 전국 팔도에서 하나가 되었다.

하루빨리 북한지역에 대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들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제대로 발굴, 조사해 국채보상운동에 깃든 독립과 나라사랑 정신을 오늘에 다시 한 번 확고히 세우고 대대로 이어가야 할 것이다.

박영석 대구문화재단 대표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