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대구시장의 세배

김해용 논설위원
김해용 논설위원

대구에는 3명의 전임 민선 시장이 산다. 문희갑, 조해녕, 김범일 전 시장이다. 전임 민선 시장 모두가 생존해 고향에 머무르는 사례는 국내에 흔치 않다. 이런 전임 시장을 현직 시장이 잘 모시지 않을 수 없다. 권영진 현 대구시장은 전임 시장들을 극진히 모시는 편이다. 대구시장에 당선된 이후 골프를 끊고 당구를 즐겼지만, 수년 전 골프를 재개한 이후부터는 전임 시장을 모시고 라운딩을 하곤 한다.

전·현 시장들이 골프장에서 한나절을 함께 보내면서 "굿샷!"만 외칠 리 없다. 모두가 대구시장 유경험자이다 보니 시정과 관련된 말을 많이 나누게 된다. 현직 시장의 고충 토로와 전임 시장의 훈수·조언이 대화의 단골 메뉴다. 선배 시장의 조언은 훈수, 간섭일 수 있지만 '돈으로도 못 구할 교훈'일 수도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권영진 시장은 전임 시장에 대한 세배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전임 시장 세 명의 손님맞이가 조금씩 다르다. 문희갑 전 시장은 여든을 넘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렬하게 후배 시장을 맞이한다. 막걸리 술상을 차려놓고 격정적 어조로 시정 관련 충고를 하는데 듣다 보면 3시간은 기본이라고 한다.

조해녕 전 시장의 손님맞이는 담백하다. 차와 강정을 내놓고는 시정에 관한 이런저런 의견과 주역 등 고담준론을 나눈다. 손님을 오래 잡아두지 않는 성향이어서 20분쯤 지나면 권 시장 일행을 '강제로' 내보낸다고 한다. 김범일 전 시장은 셋 중에 가장 조용한 퇴임 생활을 즐기고 있다. 올해의 경우 권 시장의 세배를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어쩌다 만남의 자리가 생기면 후배 시장이 새겨들을 만한 조언을 해준다고 한다.

현직 대구시장이 전임 시장을 잘 모시는 것은 같은 뿌리 정당 소속이라는 유대감이 있어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 이래 대구에서는 현 자유한국당 소속 후보만 시장에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이나 무소속 시장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도 한국당 소속 후보의 당선은 따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권영진 김재수 이재만 이진훈 등 4명의 예비후보가 각축을 벌인 한국당 예선이 사실상의 본선으로 간주됐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출마하지 않는 한 대구시장 선거는 하나 마나 한 게임이 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대구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당 권영진 후보와 민주당 임대윤 후보가 오차 범위 내에서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됐다. 한국당 후보가 매번 무혈입성해오던 보수의 텃밭이 이번 지방선거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것 자체가 이변이다. 가히 상전벽해급 변화다.

보수 후보의 일방적 승리가 수십 년간 이어져온 대구가 여야 경합지로 떠오른 것은 지역 발전에 나쁜 시나리오가 아니다. 누가 당선되든 간에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면 대구는 여야의 '집중 구애(求愛)'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선거의 박빙 승부는 유권자로서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이번 선거의 여야 각축전은 대구에서 깃대만 꽂으면 당선되는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일 수 있다. 보수와 진보가 경합하고 정치인이 인물로 승부하는 진정한 실리 선거의 시작이다.

권 시장이 이번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면 내년에도 전임 시장들 집에 세배를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세배를 받아야 하나 고민해야 할 입장이 될 것이다. '세배를 가느냐, 세배를 받느냐.'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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