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일정 규모 이상 문화사업
콘크리트 건설 경쟁에 내용 후순위
관람자에 감상의 즐거움 돌려주고
미술관 찾는 이들 편안한 장소 돼야
코펜하겐에서 동부해안선을 따라 열차로 30분을 달리다 보면 21세기형 미술관으로 주목받는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을 만날 수 있다. 풍성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미술관 입구의 첫인상은 오두막인가 싶게 소박하다. 그러나 작은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탁 트인 정원 너머로 청록 바다가 시원하고, 해안으로 이어지는 내림 경사면에는 숲과 숨바꼭질하듯 전시관들이 흩어져 있다. 그 전시장들은 다시 풍광을 끌어들인 회랑으로 연결되며 자연 속의 미술관이자 미술관 속의 자연을 편안히 연출한다.
로댕 이후 가장 주목받는 실존철학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은 한쪽 벽이 통유리로 훤히 트인 전시실에 자리하고 있다. 밀림 속 호수 같은 정경을 뒤로, 마르고 단단한 청동 입상이 처연히 드러나고 그의 형형한 눈빛은 공간 가득 조용하다. 절경과 최고의 작품이 어우러진 전시 공간의 백미를 마주하는 순간, 이 작품은 이 장소를 위해 태어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발걸음 가는 대로 즐기다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주목해야 할 작가를 찾아내어 눈앞에 진열해주는 미술관의 배려가 돋보인다. 햇볕 잘 드는 어린이 방에선 바람 부는 숲의 정경이 특히 빼어난데, 그곳에서 만들고 그리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미술품 같았다.
문득 이곳의 주인공이자 가장 큰 작품은 관람자임을 깨닫는다. 경사진 잔디밭을 구르는 쾌활한 청소년부터 바다를 마주하고 기타 공연에 행복한 노년의 커플까지, 숱한 예술품은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고 주연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며 시선 닿는 모든 곳은 그 사람만의 볼거리가 된다.
미술관 설립자 크누이드 옌슨(Knud Jensen)은 관람객을 사랑했다. 모든 작품과 공간이 사람과 감각, 감정과 지성에 있는 그대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기를 바랐다. 미술관은 기관이나 종교시설이 아니고 예술품을 위한 성소도 아니며, 찾는 이를 위한 편안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관객을 경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작품을 유리관에 보호하기보다는 손과 시선이 닿는 곳에 두어 관람자를 믿고 예우하는 신뢰형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50년에 걸쳐 완공된 곳에서 사람들은 예술의 전문성에 긴장할 필요도 없고 배워야 한다는 강박도 없이, 모두를 위한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미술관을 갖게 되었다.
필자는 한때 우리나라의 일정 규모 이상 문화사업안을 검토한 적이 있다.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 건립을 포함한 매분기 수천 페이지의 기획안을 확인하며, 콘크리트 건설 경쟁 같은 사업 내용에 종종 당황했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건물을 올리는 것이 목표인 듯했고 방문객은 물론 문화적 취지나 내용도 후순위였다. 많은 시설이 놀랄 만큼 빠른 완공을 약속하며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것처럼 제안되었지만 정작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생태와 관람자에게 주권을 돌려주고 감상의 즐거움을 재설계한 미술관이다. 이런 철학을 어떻게 잘 표현하느냐가 21세기 문화시설의 핵심이 아닐까.
미술관 없는 미술관을 거닐던 중, "제 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요?"(Am I too loud?)라던 피아노 반주자 제럴드 무어가 떠올랐다. 세계적인 성악가와 연주자들이 앞다투어 함께 공연하고 싶어 했던 피아니스트. 마지막 무대에서 독주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가 택한 곡은 연주시간 1분 20여 초의 슈베르트 소품이었다. 사람을 끄는 것은 강한 웅변이나 화려한 형상이 아니라 조용한 배려와 함께하는 모습이라는 걸, 바닷가 작은 마을을 떠나며 소중히 챙긴다.
최희경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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