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음악은 양 날개를 가졌다. 조선시대는 정악과 판소리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었고 근세 서양음악이 들어오면서는 클래식과 가요가 민족의 설움을 달래주고 한국전쟁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한국의 클래식음악의 선구자는 대구사람 박태준과 현제명이다. 박태준은 포목상의 아들로 1900년에 출생하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 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는 작곡가로 일생을 살았지만 성악에도 일가견을 보여 숭실학교 학생이던 1920년 6월 평양음악회에서 독창을 하여 만장의 갈채를 받았다. 그 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이태선 작사), 꽃봉투(윤석중 작사), 가을(박목월 작사)등 13곡을 작곡하였다. 졸업 후에는 마산 창신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이은상의 시 '미풍', '동무생각(사우)','님과 함께', '소낙비' 4편을 작곡하였다. 마산서 대구 계성학교로 옮겨 근무할 때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옵바 생각(오빠 생각)'을 작곡 발표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932년 미국 '웨스트 민스트' 음대에서 음악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돌아와 잠시 서울 있다가 1938년 고향으로 온다. 그해에 '대구성가협회'라는 대구 최초의 일반합창단을 조직한다. 1946년 상경하여 경성여의전에서 시작하여 연세대학 음악대학에서 재직(26년간)하면서 인생 전성기와 후반은 서울에서 교수생활과 각종 기관의 요직을 거치며 순탄한 음악인 인생을 살았다.
'을사오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음악계에도 소위 '친일오적'이라고 치부된 사람들이 있다. 안익태, 홍난파, 현제명, 박시춘, 남인수등이 그들이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1931년 작)"-'고향생각'을 작곡한 현제명은 박태준의 계성학교와 숭실학교의 2년 후배다. 그는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음악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돌면 나라 잃은 국민들을 위로하였다.
1925년 미국서 일년간 음악을 연수한 뒤 돌아와 서울에서 활약했는데 작곡 외에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합창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1931년에는 현제명 가곡집 1집을 출간하고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도 하였다. 193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콩쿠르 대회도 시작하였다. 해방 후에는 고려교향악단 이사장, 경성전문학교 설립자, 서울교향악협회, 대한음악가협회, 대한음악협회 회장등도 역임하였다. 그의 대표적 작품은 '가고파'와 '희망의 나라'와 그 집 앞'이다. 근대 한국 최고의 음악인 현제명. 그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산하 문화단체에 가입해 대동아제국 건설 지지성명에 참여를 했다, 관변단체인 '조선음악회' 이사를 역임하였고 일제를 찬양하는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작곡했다. 그리고 친일단체가 만든 '가창지대'의 대표 노릇을 하며 일제에 부역하였다고 한다.
이 '주홍 글씨' 탓에 그가 민족을 위해 뛰고 노력한 고생과 뛰어난 예술적 업적이 지워졌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많이 연주되고 불러지고 있는데 막상 작곡자의 신상은 모른다. 일제시대에 만주서 개장사를 하거나 하와이서 사탕수수밭에서 수수를 꺾거나 멕시코 농장에서 용설란 실을 뽑으러 가지 않는 한반도 조선사람 중에 친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10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죽지 못해 일제에 부역한 힘없는 소시민과 연예인 그리고 불쌍한 예술인들을 아직도 매국노로 모는 야비한 인간들. 중국이나 소련에게 빌붙어 조국을 욕되게 한 ‘똘만이’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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