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쑥과 마늘의 시간, 고통의 연금술

수원대 교수

우리는 하늘에서 왔습니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세운, 하늘의 아들 환웅이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곰이었다지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곰과 호랑이가 같은 굴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곰을 토템으로 했던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했던 부족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새로운 강성부족이 짠, 하고 나타나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혼맹을 맺어 강인한 부족국가가 되면서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을 밀어낸 이야기일 거라고.

그 역사적 상상력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 제 관심은 '신화'입니다. 그러니 관점이 바뀌네요. 제가 관심을 두는 건 쑥과 마늘, 그리고 동굴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자 신웅神雄에게 빌었던 그들에게 하늘이 준 것은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였습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그들에게 하늘이 일차적으로 준 것은 그들이 원했던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삼키기 어려운 쑥과 마늘,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동굴의 시간 100일,이었습니다.

삽화 권수정
삽화 권수정

살다보면 인내해야 할 일이 많지요? 쑥과 마늘처럼 목으로 넘기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쑥과 마늘을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이 있을까요? 나는 지금도 종종 고통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죄의 결과거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증거라고 믿었을 때는 고통을 그 자체로 대면하지 못하고 고통에 쉽게 동요하거나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왜 이리 어려우냐고, 죄지은 것도 없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왜 '나'냐고?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오만이었습니다. 고통이 왜 '나'만을 피해가야 할까요?

이제 나는 겨우 고통이 나만을 피해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람이 불 때 불안과 두려움에 휘둘려 오두방정 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두렵지 않은 것도, 불안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던져진 고통의 쑥과 마늘을, 잘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곰처럼 침착하게, 미련할 정도로 침착하게 인내하면서 쑥과 마늘을 삶의 양식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될 때 불운에 기죽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곰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명상록을 쓴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도 곰이었던 것 같지요? 그가 대표하는 스토아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를 가진 영혼이고, 우리 안에는 신적인 불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안의 신적인 불꽃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은 신적인 상황이라기보다 지옥의 상황입니다. 명상록을 쓸 때 아우렐리우스가 직면한 상황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여기저기 국경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아 노예가 죽고, 시민이 죽고, 군사들이 죽어갔습니다. 간교한 혀들의 아첨의 말은 춤을 추고 매일매일 자연재해가 일어납니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참, 정신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 불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인가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내 마음 속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

살아있는 말이지요? 고통 속에서 경험한 자기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의미있는 것은 그가 전쟁터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며 자기자신에게 주고 있는 철학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 인내할 것 많고 절재할 것 많은 고뇌많은 황제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채워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람 되기를 원했던 곰과 호랑이에게 하늘은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쑥과 마늘을 먹어야 하는 100일은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채워야 하는 시간이지요? 21일이든, 100일든 채워야 하는 날의 수라는 점에서는 같은 의미일 겁니다.

이시는 대로 호랑이는 그 동굴의 시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이 녹녹하지 않은 거지요? 견디기 힘든 그 시간은 지식을 쌓는 시간도 아니고, 기백을 증명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힘을 과시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 시간은 어둠의 시간이고, 인내의 시간입니다. '나'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시간, 그 시간이 없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호랑이처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지만 그러면 고통의 연금술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거지요? 살아왔던 대로 그대로, 성급한 채로 그렇게 고통의 휘둘리며 고통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면하지 못하는 고통이 이래저래 모습만 바꾸며 운명이 되어 찾아오는 이유가 아닐까요? 평생 엄마를 미워하며 엄마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아들이 아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한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적인 고통은, 그것이 가장 좋은 친구였음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기까지 반복, 반복됩니다.

부부도, 연인도, 친구도 도와줄 수 없는 시간, 오롯이 나만을 찾아든 고통 앞에 홀로 서서 어둠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시간이. 그 때 왜 내 식탁은 쑥과 마늘뿐이냐며 저항하고 항변하기보다 내 쑥과 마늘을 잘 받아서 21일을, 혹은 100일을 채우고 싶습니다.

쑥과 마늘로 연명하며 어둠 속에서 평정을 찾아야 하는 동굴의 시간을 모르는 삶은 상식을 넘어서지 않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상식과 편견과 고정관념, 그런 외피 속에 꼭꼭 감춰져 있는 '나'의 이야기, '나'만의 존재이유는 쑥과 마늘의 시간을 견디며 드러납니다.

인내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고통 없이 삶이 단단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 시간을 견딘 곰만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단군왕검을 낳았듯이 말입니다.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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