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가 읽은 책]의심없는 삶은 얼마나 허무한가/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7

매년 10월이 되면 언론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 작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올해는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했다. 선정위원의 성추문이 그 발단이다.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지난해 수상자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계 영국작가로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대학을 마친 후 런던에서 작품을 쓰고 있다. 이시구로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특유의 문체로 녹여낸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며 현대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세 번째 소설로 주인공이 지나온 인생길에서 자신이 가진 가치관과 삶의 태도에 후회의 감정을 느끼며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이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을 1989년에 수상했다. 이 소설은 1956년 여름에 영국의 한 저명한 저택 집사 스티븐스가 과거 동료인 켄턴 양을 찾아 떠나는 6일간의 여행 중에 젊었던 지난 세월을 1인칭 화자 시점으로 회고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이러한 여행은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있다가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스티븐스는 인생의 유일한 목표를 직업적 명예를 획득한 '위대한 집사'로 설정하고 그것을 충실히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는 중요한 행사에서 손님들을 완벽하게 대접하기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고 뒤늦게야 알게 되었지만 사랑으로 다가온 여인도 그냥 떠나보낼 정도로 일에 헌신했다고 강조한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그는 자신의 신념과 그로 인한 실제 결과에 대해 숙고하게 되고 그 괴리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자신이 평생 충성심을 갖고 모셨던 주인이 나치 독일에 협조적인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내적인 갈등도 겪게 된다. 주인을 통해 세상의 큰 움직임에 기여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는 이런 모습에서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다.

김찬주 작
김찬주 작 '내가 앉아 쉴 곳'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무렵에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은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머지 인생을 잘 활용하라고 충고한다. 스티븐스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지난날에 집착하고 남들이 평가하는 결과와 상관없이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느낄 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와 동시에 새 주인을 모시며 부족하다고 생각한 농담을 집사에게 필요한 기술로 여기며 모든 역량을 바쳐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고자 다짐하며 소설은 끝난다. 결국 직업적인 틀은 벗어나지 못한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300쪽)

지나고 나면 후회되는 순간이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인생을 걸고 추구해 온 삶의 가치에 의문이 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와서 그 안타까운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후회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 온 잘못된 틀에서 벗어나서 남아 있는 날을 더 나은 시간으로 채우려는 자각과 꾸준한 실천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배태만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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