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다 싸우다, 밀고 당기다,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가, 그러다가 도저히 결판이 안되면 이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싸움은 끝났다.
다툼의 마지막 해결 장소는 법원이었다. 불만이 있어도, 불편해도, 마음에 안들어도, 울화통이 터져도, 원고와 피고는 '최종 심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툼의 종결자였던 대한민국 법원이 몹시 흔들리고 있다. 법원이 엉터리 판결을 내려왔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사법 농단 사건'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간섭받지 않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사법부는 독립되어야한다는 헌법 가치까지 흔들리고 있다. 법원을 못 믿으니 이제 국회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작업에 나서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통령은 탄핵 파면된 뒤 구속 수감되고, 사법부도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빗발치는 대한민국 사회. 기자는 민주주의 가치를 우리나라 현실에 실현하고자 만들어놓은 헌법에 주목해보기로 했다.
우리 사회가 과연 헌법에 기초한 법치주의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의 질문을 받아준 이는 고문현(숭실대 법학과 교수·경북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헌법학회 회장이었다.
가을 정취가 아직도 듬뿍 남아있었던 서울 동작구의 숭실대 캠퍼스에서 지난달말 그를 만났다. 헌법 전문가로 알고 찾아간 그의 연구실 문앞에는 환경부, 그리고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기술개발 및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 협업하고 있다는 내용의 팻말이 붙어있었다.
"잘못 찾아왔나? 헌법학회 회장 연구실 맞아?" 궁금한 것을 못참는 성질 급한 기자는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연구실 문앞 팻말에 담긴 의미부터 물었다.
-저건 뭔가? 이산화탄소 지중저장 환경관리 및 융합형에너지·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환경부, 산자부와 협업하고 있다는 내용이 붙어있든데?
▶그렇다. 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해 과학과 법률을 융합하는 작업이다. 온실가스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데 온실가스의 대표적인 것이 이산화탄소다. 이를 줄여야한다. 공장 굴뚝에서 오염원이 배출되면 이를 포집한 뒤 액체로 만든다. 그리고 이를 지하 1천m 지점 정도에 저장해 바다로 빼낸다. 그리고 해양에 지중저장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누구나 누려야하는, 즉 깨끗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적 가치, 우리 헌법 35조 환경권이 보장된다. 나는 이러한 과학적 절차를 구체화하는 법률을 만드는데 자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헌법적 가치인 환경권을 보장하기 위해 환경과학기술을 뒷받침하는 법률 정비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인가?
▶법학을 전공했지만 나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환경 관련 공부를 했다. 대학 시절 폐결핵에 걸려 고시 공부를 그만둬야했는데 병을 앓았던 경험이 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도 됐다.
요즘 미세먼지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지듯 공기는 가장 중요한 환경요소다. 나는 법률이 탁상공론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내 삶에 얼마나 현실적인 영향을 미쳐주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법률이다.
세계에너지기구는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를 지금보다 17% 줄일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신재생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은 물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온실가스를 줄여야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기술이 발전하는 반면, 법·제도적 뒷받침은 허술하다. 이러한 추세에 맞는 법이 거의 없다. 법률이 아니라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 정도가 있을 뿐이다.
환경부가 이러한 관련 법률을 정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산업부는 에너지법과 제도에 대한 전문가를 키울 수 있도록 조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헌법학자인데 헌법 역시 우리 삶속에 바로 살아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내가 환경 연구까지 하는 이유는 헌법을 우리 실생활 속 깊숙이 적용시키는 것이다. 공룡이 왜 멸종됐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다. 우리 인류도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환경변화로 종말을 고할 수 있다.
법학자들이라고 해서 법전만 들여봐서는 안된다. 법학과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의 칸막이를 없애야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실사구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좋은 생각이든, 멋진 아이디어든, 훌륭한 기초·응용과학기술이든 이것이 제도화하고 체계화할때 사회에서 쓰임새가 커진다.
법률은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지향점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다. "저 사람 이상한 사람 아냐?" "사이비 학자 아냐?" 이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학문간에 칸막이를 너무 친다. 융합연구를 안하려고 한다. 미국 가서 학회 가고 세미나를 가보라. 지구환경과학 세미나에서 그 분야 학자가 법률에 대해 설명을 한다. 우리도 담장을 허물어야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연구결과물이 나온다.
-요즘 가장 큰 이슈가 사법 농단 사건이다. 사법부의 신뢰가 치명타를 입었다. 헌법학회 회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법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참담하다. 이 모든 것은 법조 영역의 권위적 문화와 관계돼있다. 우리 사회 다른 영역에서 대부분 청산되어가고 있는 이 권위적 문화가 사법부에서 제일 심하게 나타나고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
이런 말도 있다. 법관들이 등산 가는 모습을 보면 법원의 문화를 안다고. 법원장이 제일 먼저 앞서 나가고 서열대로 산을 오른다. 이것부터 깨야한다.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서는 이러한 권위적 문화부터 사라져야한다. 담당 법관에 모든 재판 권한을 줘야하는데 이러한 권위적 문화가 있다면 재판의 공정성이 침해받게된다. 이런식으로 가니 지금 사법부의 독립성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공정성이 생명인 사법부는 깊이 성찰해야한다.
-일부 법관을 탄핵하고 특별재판부도 구성해야한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식의 극약 처방이 필요할 것인가?
▶일부 법관에 대한 탄핵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헌법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사건에서 양심을 저버린 정황이 나타났다. 이는 명백한 헌법 위반이며 중차대한 문제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관계에 근거한 탄핵이 이뤄져야한다. 국회가 이 부분에 대해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객관적 사실을 중심으로 파악해봐야한다. 심도있는 조사가 이뤄져야하며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한다.
특별재판부 구성에 대해서는 나는 반대한다. 사법부가 특별재판부 구성에 앞서 먼저 쇄신대책을 내놔야한다. 이 부분은 자성의 기회를 줘야한다. 이러한 자성의 기회를 주고 이마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때는 특별재판부 구성으로 간다고 압박해야한다. 사법부 스스로 국민들 앞에서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지금 법원에 대한 수사 등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 검찰권이 동원되고 있다. 검찰이 너무 과도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재인 정부의 첫번째 개혁 타깃은 검찰이었는데 적폐 청산 때문에 개혁이 미뤄지고 있다. 검찰 개혁도 반드시 해야한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독점하고 있는 나라가 없다. 실제 경찰이 수사를 하고 있는데 수사권을 주지 않고 있다. 수사권은 경찰로 이관해야한다.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나오면 나라의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비대한 권력을 합리화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견제와 균형이 반드시 있어야하고 이런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공직자비리수사처도 반드시 설치해야한다. 검찰개혁이 늦어져서는 안된다. 국가 100년 대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구조적 문제는 결국 개헌으로 풀어야하는 것 아닌가?
▶동의한다. 우리 헌법이 31년됐다. 사람이 태어나서 몸이 자라는 과정에서 계속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데 우리는 31년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덩치 큰 성인이 아기옷을 입고 있는 모양새다. 정치현실과 헌법이 맞지 않다.
지금 전직 대통령 2명이 구속수감돼있다. 왜 그런가? 헌법을 고쳐야한다.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쏠려있다. 권력을 이제 나눠야한다. 나누지 않으면 대통령의 비극이 계속된다. 국제세미나 가면 외국 학자들이 질문 공세를 쏟아낸다. 한국은 왜 그러냐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이 이뤄져야한다.
장관이 고위공무원의 인사권도 행사하지 못한다. 이런것까지도 청와대가 다 간섭을 한다. 권력을 분산하는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통령의 권력을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앙정부의 권력을 지방으로 돌려주는 것도 서둘러 해야한다.
자질이 안된다고, 자립도가 떨어진다고, 자꾸 미루고 있다. 이제는 해야한다. 지방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이도록 권한을 과감하게 되돌려줘야한다.
지방분권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방에 돈이 있어야한다. 재정적 자립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가 지방분권의 핵심요소다. 이를 담보하는 개헌이 이뤄져야한다. 독일은 헌법에 지방재정조정제도가 있다. 돈이 많은 지방정부가 넉넉하지 않는 지방정부로 돈을 보내는 제도다.
"왜 그래야되지?"라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선진국의 발전과정을 보라. 당장은 부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식으로 하니 공동체가 더 잘 유지됐다. 멀리 갈려면 함께 가야한다. 이런 공동체 가치를 지향할 때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있다.
-개헌을 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역할이 중요한데?
▶국회가 너무 이해관계자들의 입김에 휘둘린다. 변호사·약사·의사 등 전문직들의 기득권을 지켜주고 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특히 국회의원들이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분야에 대해 너무 챙겨주기를 한다. 친정 챙겨주기가 너무 심하다.
검찰이 영장청구를 독점하는 것도 고쳐보자고 하면 큰일날 것처럼 얘기한다. 왜 큰일나나? 권력을 나누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데 국회의원들이 그런 원리도 모른다. 시대 상황에 맞게 생각을 바꾸고 공익을 고려해야하는데 국회가 아직 멀었다.
최근 불거진 유치원법 개정 관련 상황을 보라. 국회의원들이 정말 국민의 요구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공사를 구분하는 국회의원들이 되어야한다.
-개헌 논의가 글자 그대로 논의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발걸음을 빨리 하자면?
▶여러가지 난관이 있는데 본질을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선언적 문구, 즉 5·18 광주민주화항쟁 정신을 넣고 촛불정신까지 넣자고 하는데 이렇게 다투다보면 결론이 안난다. 헌법에 4·19 정신이 있다. 5·18이나 촛불은 이 정신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런 선언적 문구는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한다. 앞으로도 이 부분에서는 최소한의 개정만 해야한다. 그래야 유연한 개헌이 가능하다.
헌법개정절차를 담은 부분도 고쳐야한다. 개헌 문턱을 지금처럼 높여놔서는 안된다. 개헌을 자주해야한다. 왜냐하면 사회의 변화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다. 세계적 무한경쟁에서 이겨야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런 부분에 대해 너무나 둔감하다. 개헌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한다. 국회의원들이 정말 각성해야한다.
-곧 개헌을 이뤄낸다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가?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기적을 이뤄냈고, 민주화의 기적까지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입헌주의 기적이다. 정말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정착화, 정치발전을 이뤄낸 기적을 개헌을 통해 세계 각국에 과시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무형의 자원을 세계로 수출할 수 있다.
소련 연방이 무너진 뒤 우크라이나 헌법은 독일의 아이젠제(Isense) 교수가 만들어줬다. 독일의 헌법 체계가 수출된 것이다. 무형의 인프라도 수출될 수 있다.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들이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발전이 향후 이뤄져야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요즘 연구하는 기후변화 관련 법률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세계속에 우리가 쌓은 노하우를 수출할 수 있다. 세계에서 우리의 역할을 더 키울 수 있느냐, 마느냐, 우리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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