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낯선 타인에 대한 예의

최희경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최희경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최희경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낯선 이와 쉽게 친분 나누는 북유럽

타협과 합의의 정치 문화 만들어내

친해야 할 사람끼리만 친한 우리들

모르는 이들에 좀 더 포용적이어야

지난 이맘때, 덴마크 한국 식당에서 몇 사람과 점심을 하고 있었다. 한 부인이 우리 쪽으로 오더니 갑자기 필자의 스웨터 색상이 예쁘다고 칭찬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라 얼결에 고맙다고만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세실리아 박사가 이내 그 말을 받아, "나는 당신 코트 색이 마음에 든다"며 그녀와 대화를 시작했다. 소소한 주제로 한참을 웃으며 얘기가 오갔고, 합석이라도 할 기세였을 즈음 부인은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런 풍경은 덴마크에서 낯설지 않다. 한번은 동료들과 미술관에 갔는데 스티그 박사가 지나가던 이와 반갑게 인사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한참 후 스티그 박사는 필자까지 불러 소개시켰다. 자신의 이름과 전공을 밝힌 그 사람은 필자의 연구에 대해 물었고 한동안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그와 헤어진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은 뜻밖이었다. 필자와 인사한 이는 덴마크국립박물관의 관장이었고 스티그 박사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었다. 'TV 등에 출연하는 걸 몇 번 봤는데 마침 지나가기에 평소 궁금했던 예산 문제를 물어본 것'이라고 했다.

그 후 문헌을 통해, 낯선 이와 쉽게 친분을 여는 덴마크 사람들의 성향은 오랜 관습임을 알 수 있었다. 금년으로 개장 175주년을 맞은 놀이공원이자 공연센터인 티볼리는 일찍부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격의 없이 만나고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1874년, 영국 작가 에드먼드 고시가 묘사한 당시 티볼리의 모습이다. "저녁이면 매우 민주적인 덴마크 생활이 티볼리에 펼쳐진다. 노동자가 외무장관에게 담뱃불을 빌리고 상인 가족이 대사와 함께 어울리는 곳."

이와 대비되는 일화도 있다. 인류학자 베스터고드 부부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한 무리의 중국 학생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가벼운 인사에 응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지나가는 이들과 인사를 건네거나 눈을 마주치는 학생도 없어 부부는 놀랍기도 하고 무례하다고도 느꼈는데,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으려니 짐작했다고 한다.

낯선 타인을 대하는 예법은 동서양 간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예법은 친분 있는 이들 간의 것이었으며 생면부지의 타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가족, 친우, 동문, 동향, 사제 관계 등 어떤 형태로든 연고가 중요했고 대부분의 예의는 연고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교는 연고에 한정되는 규범이란 뜻으로, 친해야 할 사람끼리만 친한 '친친'(親親)주의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반해 '우리' 밖의 낯선 타자에 대한 사회 규범은 특별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무관심하고, 여기에 안전과 신뢰 문제가 더해져 경계하고 외면하는 방책이 굳어진 것 같다. 낯선 이가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말고 피하라는 행동 수칙이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걸 보면 '대문 밖 지옥'이란 표현이 과장만도 아니다.

사회는 가정과 친분 밖의 낯선 이들을 포괄하는 범주이다.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누구와도 대화하기 어려운 사회가 있다. 타인과의 격의 없는 관계가 기반이 되었을까. 북유럽은 지난 100년간 타협과 합의의 정치 문화를 만들어냈다. 노사대타협을 이끌고 경제위기에선 보수와 진보가 협력했으며, 실리를 위해서는 지금도 좌우가 기꺼이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들도 최근 대거 유입된 난민과 이민자 앞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북유럽의 관용주의 역시 최소한의 동질성을 전제로 했던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는 모르는 타인에게 좀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어내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승강기 안 낯모르는 타인끼리의 가벼운 인사, 출입문을 밀면서 뒷사람을 위해 잠시 잡아주는 배려-작지만 중요한, 타인에 대한 예절이 새해에는 일상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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