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뜨거웠던 대구의 여름날들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책가방을 멘 까까머리 한 남자아이가 동대구역 광장 앞에 서있다. 빽빽이 지어진 고층 빌딩 아래 끝없이 펼쳐진 왕복 10차로. 도심 풍경은 갓 기차에서 내린 시골뜨기 소년을 매료시킨다.

"이런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여기서 꼭 살아볼래!"

소년은 두근대는 마음을 움켜잡고 대로변에 서서 오가는 차들을 주의 깊게 응시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소리 없이 강한 레간자일까? 어디든 누비는 누비라일까? 아니야. 우리 작곡 선생님은 그랜저일지도 몰라!"

'빵빵!'

파란색 1t 트럭이 전조등을 켰다 껐다 하며 도로 가장자리로 들어오고 있다. 소년은 이내 트럭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근사한 승용차들 사이에서 그가 기다리던 백마 탄 왕자님을 찾는다.

"학생!"

해병 츄리링 바지에 목 늘어난 반팔 티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트럭에서 내려 소년을 부른다.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는 소년은 당황한 모습이다.

"서..선생님…?"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하라는 '공부'를 한 후 좋은 대학 동아리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라는 말씀이 소년에게 성경 구절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모른척하고 돌아서기엔 너무 늦은 듯하다.

높은 빌딩 숲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지나, 낮고 좁은 주택가 골목길로 트럭 한 대 들어온다. 청년은 틈새 공간을 활용해 능수능란하게 주차를 마치고서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소년을 레슨실로 이끈다. 신디와 듀얼 모니터. 근사한 믹서기와 스피커. 꿈꿔오던 스튜디오를 직접 보게 된다는 설렘에 이전의 당황스러움을 잊은 소년은 청년을 따라 주택 옆 계단을 뒤따라 오른다.

뜨거운 햇살에 에워쌓인 옥탑방은 황토방 만큼이나 뜨겁다. 에어컨을 대신해 선풍기로 달궈진 온도를 달래고, 흡음재를 대신해 옷가지들이 음악소리를 방음하는 듯하다. 조율 안된 피아노 위에 오선지와 지우개 달린 2B 연필만 놓여있을 뿐 상상했던 작곡 스튜디오의 모습은 없었다. 풍운의 뜻을 품고 기차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온 소년은 여긴 아니다 싶어 되돌아갈 길을 모색하는 찰나 청년은 얼음 섞인 주스를 소년에게 건네며 성악 발성으로 운을 던진다.

"음. 뮤지컬이란 말이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13년 여름날.

대구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 폐막식 어워즈 무대 위에 슈트를 입은 둘이 나란히 서있다. 1t 트럭에 무대 세트를 싣고 다녔던 꿈 많던 청년은 대상 트로피를 거머쥔 채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음악감독으로 보이는 그 소년은 스승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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