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대구 품격의 딜레마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전염병 공포가 뒤덮고 있는 대구는 황량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아비규환을 예상하며 찾아온 외신 기자의 눈에 비친 대구는 절제된 모습이었다. 지레 겁을 먹고 들른 외지인의 시야에 들어온 대구는 동면하듯 조용히 숨 쉬는 도시였다. 눈에 띄는 일탈도 없고 타인에 대한 민폐도 없다. 일상이 정지된 듯, 휴업 상태인 듯하지만 모든 게 평소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줄서기는 있어도 사재기는 없었다. 이기적인 불평과 불만보다는 이웃에 대한 배려와 위로가 많다. 전염병 대란 속에서도 의연한 대구를 들여다보고 바깥 사람들은 '대구의 품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구 사람들은 그런 평가에 관심도 없다. 그냥 하루하루 은인자중하며 살아갈 뿐이다. 옛 선비들은 경상도인의 이런 인품과 기개를 두고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대구는 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서 국채보상운동의 첫 횃불을 들어올린 곳이다. 반세기에 걸친 항일투쟁에서 가장 격정적으로 저항하고 가장 오랫동안 항거하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 대구경북이다. 1950년대 고립무원의 분지에서 낙동강 전선을 온몸으로 사수하며, 전쟁이 헤집어 놓은 폐허의 언저리에서도 수많은 피란민들을 껴안았다.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 속에서도 낭만과 인정을 저버리지 않았다. 2·28민주운동의 산실이요, 한국 경제 성장의 전진기지였다.

그런 대구가 지금 홍역을 앓고 있다. 미증유의 전염병에 쓰러지고 악랄한 중상모략에 시달리고 있다. '대구 코로나' '대구 봉쇄' '대구 신천지' '대구 사태' '투표 업보' '미통당 손절' 등등 방역 실패보다 더 쓰라린 염장 지르기가 횡행하고 있다.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대구경북 사람들에게 폄하와 왜곡, 비하와 모욕의 망언과 망발을 서슴지 않으며 상처 난 가슴을 다시 뒤집는 그들은 누구인가.

울분을 드러낼 수도 없다. 속울음만 삼킬 수도 없다. 품격이란 단어에 갇혀 있자니 속에 천불이 난다. 품격이 흩트러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마타도어가 더 난무할 것이다. 총선을 앞둔 정치적인 선택마저 딜레마이다. 오만하고 무능한 정권이 초래한 전염병 대란과 정신적 환란을 스스로 위무하고 채찍질하며 유장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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