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에는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죽음이 허다했고, 인간의 존엄은 심대하게 말살되었다. 전쟁 중 군에 복무하던 시인 구상은 1950년대 대구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는 한 글에서 일제강점기에 타향에서 반갑게 정을 나누던 동포가 알지도 못하는 이념 때문에 적이 되고, 총부리를 겨누게 된 상황을 한탄하였다. 또한 '초토의 시'에서 그는 적의 무덤 앞에서 알 수 없는 거대한 슬픔, 죽음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 말할 수 없이 큰 회한을 노래하기도 했다.
전쟁은 현대미술에도 많은 흔적을 남겼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많은 전후 미술 현상이 나타났다. 1차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대표적인 사조는 초현실주의이고, 2차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경우 추상표현주의, 유럽의 경우 앵포르멜 같은 사조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조의 등장에는 전쟁의 영향으로 파괴된 인간성의 상실이나 정신적인 충격이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에 비해 한국의 전후 미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크게 다루어진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대구의 경우, 전쟁 이후에 자연주의 미술을 넘어서는 미술 형식의 확장이 있었고, 그 가운데 전쟁의 영향으로 나타난, 혹은 서구의 전후미술을 참조한 형식이라 불릴만한 경향이 다수 나타났다.
1950년대에 대구에 나타난 추상화는 구체적인 양식적 배경을 가진 추상이라기보다는 자연주의적 아름다움을 구가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적극적으로 새로운 양식을 찾았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1950년대 세대교체의 주역이었던 정점식(1917~2009)은 1946년 하얼빈에서 귀국하였으나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친 시기는 전쟁 후부터였다. 정점식의 초기 추상화는 형상에서 점점 추상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피란 온 문인들 중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1953년 정점식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단순화된 선묘 등이 나타난 그의 작품을 '묵화의 기법으로 그린 한국적인 서양화'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장석수(1921~1976)는 추상표현주의를 '귀중한 회화 생명에 육박하려는 작화 태도'라 옹호하면서, 1950~60년대 자신의 작품에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작품 '광녀'(1955)에서는 표현적인 묘사가 나타나고, '사정(射程)'(1959), '작품'시리즈(1960년대 중반)에서는 잭슨 폴록이나 피에르 술라주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또한 1955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모교인 계성중학교로 부임한 박광호(1932~2000)는 6·25 전쟁 중 학도병으로 종군하였는데, 그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와 관계가 있다. 그때 경험했던 일말의 양심이나 감정조차 파괴된 부조리한 세상은 그의 몇몇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인 서사와 표현으로 나타났다. 그밖에도 강우문과 서석규와 같은 구상 작가들도 같은 시대를 겪으면서 해체된 형상이나 표현적인 구상의 형식을 보여주면서 한때 추상 경향에 가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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