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동일칼럼] 사면은 원래 '정치적'이다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2월 31일 임기 중 마지막 특별사면 등을 실시했다. 사면 대상자 중 신건·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특이한 경우였다. 두 전직 국정원장은 '불법 감청' 관련 혐의로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상고 마감 시간이 임박한 2007년 12월 27일 오후 4시 30분 상고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신 전 원장은 오후 6시 30분, 임 전 원장은 오후 8시쯤 상고를 취하했고 27일 자정 이들은 '유죄'가 확정되었다. 두 사람의 사면 발표는 그로부터 나흘 뒤에 나왔다. 짜고 친 것이라 비난할 수 있지만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한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위라는 해석 외에 다른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사면은 이처럼 정치적 행위이다. 사면은 형사사법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형 선고의 효력 상실·공소권의 소멸·형 집행의 면제를 명하는 대통령의 특권이다. 원래 왕조시대 국왕의 '은사권'(恩賜權)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정도로 정치적 제도이다. 법률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면권은 법치주의 무력화, 평등원칙 위반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에서 이를 헌법상 제도로 도입한 것은 그 나름의 필요성 때문이다. 독일에서 "사면 없는 법은 불법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대통령 등 국가원수는 사면권 행사를 통해 형사사법 제도 운용에 있어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놓고 정치적 고려가 없었다거나, 정치적 해석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된 발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은 당연히 임기 말 문재인 대통령과 현 집권 세력의 정치적 고려와 의도에 따른 정치적 행위이다.

일부에서는 한명숙 전 총리 복권, 이석기 전 의원의 가석방을 위해 박 전 대통령 사면을 결정했다고 비난한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박 전 대통령의 건강을 고려하여 사면을 결정하고 한 전 총리 복권, 이 전 의원 석방 등을 결정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떤 경우든 더 중요한 건 야권이 박 전 대통령 사면에 따른 정치적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간 여러 차례 거론되던 사면이 무산되었지만 대선 전 박 전 대통령 사면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박 전 대통령 사면만큼 야권 분열 용도에 적합한 카드는 없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지 말라는 여권 정치인들도 사면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모순된 말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은가.

박 전 대통령 사면과 동시에 분열된 보수 진영에서는 당장 더 큰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침묵을 일관되게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며 "그렇게 되면 윤석열 후보 쪽이 굉장히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수사 등에 대한 윤 후보의 사과를 대구경북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라면서 '선수 교체'를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사면, 대선 새 변수되나?" "박근혜 사면, 윤석열에 미칠 영향은?" 등 TV 시사프로의 제목은 보수 야권 진영의 분열과 반목을 부채질하고 있다. 윤 후보의 입장이 곤혹스럽다는 점도 계속 강조하고 있다. 향후 자유의 몸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선택에 따라 박빙의 대선 구도는 다시 한번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 침묵을 지키면 지키는 대로, 발언이 전해지면 전해지는 대로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윤 후보와 야권을 지지하고 정권 교체를 호소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그의 존재는 야권에 불리하게 작용할 게 분명하다. 전망은 비관적이다. 사분오열, 내우외환에 처한 윤 후보와 국민의힘이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여권은 박 전 대통령 사면이라는 정치적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면은 본래 정치적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정치적 대응책을 모색해야 마땅하다.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보다 덫을 보면서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사냥감의 미련함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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