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이제부터는 대한민국과 나의 대결이다"

이상헌 신문국 부국장
이상헌 신문국 부국장

몇 해 전 '한국인 고문법'라는 글이 SNS에서 꽤 공감을 얻었다.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주기, 인터넷 속도 10mb 이하로 낮추기, 화장실 갈 때 휴대폰 못 갖고 가게 하기, 엘리베이터 닫힘버튼 못 누르게 하기 등이다. 택배 수령 일주일 뒤에 하기가 포함된 버전도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이나 행동 패턴에 금기(禁忌)가 주어지는 상황이다. 짧은 순간이나마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여유가 부족한 우리네 삶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나 또한 대부분 항목에 해당되는 터라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올해는 한국인 고문법에 하나가 더 추가돼야 할 것 같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선 후보 가운데 선택하기이다. 결과에 따라 각자에게 앞으로 5년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처지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주변에는 3월 9일 늦은 밤 개표 방송을 보며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모르겠다는 이들 또한 늘고 있다. 이른바 부동층의 확산이다.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진영 의식이 줄었다는 의미라면 좋겠지만, 정치 혐오가 오히려 심화됐다는 방증일까 봐 두렵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이나 조국 사태처럼 정치 과몰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그보다 훨씬 위험하다. 헌법 1조로 보장한 국가 최고의 권력인 민의(民意)가 사라진 땅에는 독재의 씨앗이 자라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부동층 확대는 유력 후보들의 성정(性情)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후보는 "극단적으로 발달한 기회이성의 소유자"란 진중권 씨 평가대로 표 계산에 탁월하다. '나를 위해 이재명'이란 슬로건처럼 계층·연령·지역별 입맛에 딱 맞춘 공약을 연일 쏟아내며 '조국의 강'을 건너려 한다.

말 바꾸기에도 주저함이 없다. 5년 전 출마선언문의 박근혜 사면 불가, 원전 제로 정책은 "어쩔 수 없는 측면" "국민 의사와 객관적 검증"으로 달라졌다. "정책에는 저작권이 없다"는 이번 출마선언문처럼, 마치 보수 진영 후보같이 부동산 감세를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우기도 한다.

반면 윤석열 후보에게선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신년사 방점은 7개월 전 출마선언문과 똑같이 '공정' '정의' '상식' 같은 추상명사에 찍혔다. 구두를 벗고 큰절을 하며 변화를 다짐했건만 지지율 추락에 따른 생존 본능이라고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아직은 정권 교체론이 정권 재창출론보다 앞선다는 데에만 기댄 것이다. 경선에서 그를 최종 후보로 밀어붙인 당심(黨心)의 한계이기도 하다. 적장의 몽골 기병 사령관 같은 임기응변이 없다면 참모라도 잘 둬서 공명(共鳴)을 끌어내야 하는 데 그마저도 외면한다.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무대인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세속적 출세만 꿈꾸던 주인공 라스티냐크는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돈으로 딸들을 귀족 부인으로 만드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결국 외로운 죽음을 맞는 고리오 영감을 보며 "이제부터는 파리와 나의 대결이다"라고 외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대선 후보들이 새해에는 대한민국을 위한 깊은 고민을 해주길 바란다. 득표를 겨냥한 '변화를 위한 변화'가 아니라 '변화로의 변화'를 이끌 리더십 말이다. 대한민국을 개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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