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당신의 잊지 못할 순간은?

황희진 디지털뉴스부 차장
황희진 디지털뉴스부 차장

신문 오피니언 코너는 참 삭막한 공간이다. 세상에 대한 비판의 밀도가 높은 곳이고, 특히 요즘은 대선 직전이라서 살벌한 정치 얘기가 연일 오간다.

그래서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오늘 이곳에는 '잊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수년 전 올라와 시선을 모은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의 댓글 중 몇 개를 골라 정리했다.

주로 10대 등 젊은 층 네티즌들이 1천 개에 가까운 사연을 댓글로 적었다. 몇 년 지나 재방문해 다시 읽었다는 네티즌도 꽤 보이며, 나이를 먹으며 계속 와서 열람할 수 있도록 원본 글을 지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댓글도 확인된다.

요즘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영상·사진으로는 쉬이 담아낼 수 없는 '글'들이다.

#막내를 처음 안았을 때. 아기를 처음 안아본 것이었는데, 너무 작고 가벼워서 살짝만 힘을 줘도 아파할 것 같고 힘을 빼면 떨어질까 안절부절못하던, 그 10초도 안 된 시간.

#별거 아니겠지만, 어릴 적 모든 시간을 엄마랑 지낸 거.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랑 밥 먹고, 유치원 가기 전에 엄마 손잡고 같이 이야기하며 걸어가고, 유치원 끝나면 엄마가 데리러 오고, 엄마랑 슈퍼 가서 간식 사고 엄마랑 TV 보고 놀았던 거. 엄마 너무 보고 싶어.

#엄청나게 더운 날 자고 있는데 할머니가 밤새 나 더울까 부채 부쳐 주신 거. 선선한 바람 부는 날이면 항상 그때가 생각남.

#네 살 때 해수욕장에 갔는데, 노란색 어린이용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혼자 놀다가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우리 텐트를 찾다가 색깔이 비슷한 텐트로 들어갔는데, 처음 보는 20대 언니들 만나서 같이 삼겹살 구워 먹은 거. 그분들 지금쯤 결혼하셨겠지?

#나는 아기새처럼 옆에 입 벌리고 있고,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사과 한통을 전부 숟가락으로 일일이 긁어서 내 입에 넣어준 일. 지금은 그렇게 숟가락으로 긁어 먹어도 그맛이 나질 않아. 할머니 보고싶어.

#강아지 키우던 시절. 햇빛 들어오는 침대에서 같이 낮잠 자고. 같이 텔레비전 보다 나른해서 낮잠 자고. 아침에 잠에서 못 일어나고 있는데 침대로 뛰어와 킁킁대며 핥아서 깨고. 잘 지내니? 땅콩아.

#초등학교 1학년 때 계주를 했는데 넘어졌음. 그래서 뒤에서 야유 소리도 나오고, 난 펑펑 울었음. 그런데 엄마가 와서 같이 뛰어줬음.

#서울로 전학 와서 친구도 없고 모든 게 낯설던 시절, 학원 마치고 나오니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비 맞으며 집에 가야 하나 싶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가 내 이름 불렀을 때.

#예전에 왕따 당할 때 혼자 밥 먹고 있는데, 국어 선생님이 내 옆에 조용히 와서 같이 밥 먹어주신 거. 진짜 밥 먹는데 울 것 같아서 끅끅대면서 먹었음.

#나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어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어. 응급실 침대에 누웠을 때, 엄마가 내 손 꼭 잡고 기도하고 있었고, (나중에)엄마 핸드폰으로 인터넷 들어가니까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이유' 이렇게 검색이 돼 있더라구.

#할아버지가 혼자 모으신 돈으로 산 집이 아빠 때문에 팔릴뻔하다가 엄마가 어떻게 막아서 이사 안 가게 됐을때. 집에 할아버지랑 나랑 둘만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우리 이사 안 가도 된다고 나 안으면서 우셨던 날. 할아버지 너무 보고 싶다. 내가 맨날 화내서 미안하고 사랑해.

#여름에 더워서 우리 가족 다 같이 거실에서 자는데, 어느날 자다가 깨서 그냥 눈 감고 누워 있었는데, 엄마가 우리 가족 빚 다 갚을 수 있고, 나랑 동생 보잘것 하나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남 부러울 것 없는 아이로 자랄 수 있게 하겠다고 한 거. 얼마 전에 들은 거라서 진짜 다 기억해서 메모장에 써놨어.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아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고 있는 여자애 하나 있는데, 하루는 걔랑 아침부터 싸워서 걔는 먼저 학교로 걸어가고 나는 뒤에 따라가고 있었어. 솔직히 말하면 째깐한 게 먼저 시비 걸어서 싸운건데, 얘가 삐지면 되게 오래가서 먼저 사과해야겠다 생각하고 이름 크게 부르니까, 걔가 "뭐!" 하면서 뒤로 도는데, 진짜 세상이 멈추는 것 같더라. 너무 예뻐서.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으니까, 그냥 얘가 먼저 갔어. 나는 쟤가 오늘 왜 저러나 나는 왜 이러나 혼란스러워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걸어가다 지각하고. 아무튼 그날이 내 인생에서 제일 잊지 못할 순간인 것 겉다. 이게 1년 전, 딱 이맘때. 사실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어.

#반끼리 단체 공연하는 게 있었는데, 우리 '쌤'이 열정적이셔서 저녁까지 체육관에 남아서 연습하고 있었음. 그런데 쉬는 시간에 친구랑 얘기하다 체육관을 둘러봤는데, 저녁이어서 노을 때문에 약간 주황색 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고 애들 농구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서 그 풍경이 너무 좋았음. 그 풍경을 커서도 보고 싶어서 선생님 되기로 결심했음.

#수능 날 점심으로 엄마가 싸 준 도시락 먹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골라 들어 있던 것.

#할아버지가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꾸셨는데 자꾸 나보고 사진 순서 좀 바꿔 달라고 하셔서, 나는 (귀찮아서)계속 모른다고 했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 휴대폰 앨범을 보니까 9개 사진 중 7개가 내 사진이었음. 그 사이에 어떻게 순서 바꾸는 건 배우셔서 나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순서로 해 놓으셨음. 할아버지, 미안하고 사랑해요.

#첫번째 수능 망하고, 두번째 수능 보러 수험장으로 가는 교문 지나는데 뒤에서 엄마아빠가 손 흔들어줬을 때. 그때 너무 울컥해서 교실 들어갈 때까지 엉엉 울면서 들어감.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 난다.

#유치원 실습할 때 제일 작고 말도 늦어서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가 있었어. 다른 애들은 선생님에게 애교도 부리는데 이 친구는 내가 말을 걸어도 그냥 가고 정말 아기 같은 아이였어. 어느덧 실습 마지막 날이 됐는데, 평소처럼 애들과 블록 쌓기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와서 안겼음. 그래서 계속 안고 다녔는데 내 귀에 대고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 불러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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