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야성과 맞닥뜨리다

이근자 소설가
이근자 소설가

이사 온 후에 보니 이 동네가 예전에 과수원이 많았다고 했다. 지금도 동네는 온통 언덕투성이다. 오르막 아니면 잠깐의 평지 그리고 내리막이었으니. 시장이나 아부지 집에 가는 길도, 대학교 캠퍼스 안도. 그래서 건물 사이나 도로 곁에는 가파른 야산이 몇 군데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야 평야가 넓지 않으니, 사람들 거의 모두가 언덕이나 산 근처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새삼 우리나라의 지형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요즘 취미가 동네걷기여서다. 언덕이 많은 동네에 사는 게 맛있어서 하는 경험담에 많은 이가 공감할 터다. 이사 온 지 겨우 1년이니 너무 일찍 호들갑을 떠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눈이나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아서인지도.

어쨌거나 이 동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야생동물을 몇 종류나 봤다. 뭐 그렇게 시시하냐고, 누군가는 집의 창문 너머로 매일 고라니나 너구리를 본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럼 할 수 없이, 나는 살면서 새끼 멧돼지가 짧은 다리로 총총거리며 건물 사이의 차도를 돌아다니는 동네에 처음 살아봐서 호들갑이라고 변명해야겠다.

막 가로등이 켜지던 어스름한 가을 저녁이었다. 나는 변전소와 학교 사이에 난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보도블록이 깔린 2차선 너비의 인도는 경사가 40도는 넘어 보였다. 길은 100m가 채 되지 않지만 꼭대기까지 쉬지 않고 올라가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 길은 나의 심장을 한계치까지 몰아갈 수 있는 데였고, 늘어진 나뭇가지와 하늘로 인해 신비로운 분위기가 나서, 즐겨 걷는 곳이었다.

그 길을 조금 올라왔을 지점이었다. 길의 8부쯤에 처음 보는 동물 세 마리가 어슬렁거렸다. 고양이보다 큰 것은 어미처럼 보였고 새끼들이 있었다. 분명 교과서 같은 지면에서 보아 낯이 익은 동물, 너구리였지만 실제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도망쳐야 하는지, 계속 다가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끊임없이 추측을 했다. 큰 놈이래야 덩치가 고양이만 하니 내가 발을 쳐드는 것으로 물러나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섰다. 그러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있잖아. 너구리가 육식인가?" 다행히 내가 다가가자 너구리 가족은 도망을 쳤다.

언덕에 올라서 고양이집사라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내가 너구리를 봤다고 하자 고양이집사가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것들을 잡아가라고 주민자치센터에 전화했다가 거절을 당해서였단다. 너구리가 사람에게 무해하다는데,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이 재미있었다. 자신이 돌보는 고양이를 너구리가 위협한다나 뭐라나. 너구리의 으름장에 고양이가 주눅 든단다. 내가 대답 없이 멀뚱히 바라보자, 그 길을 이용하는 아이들도 너구리 일고여덟 마리가 몰려 있으면 무서워한다고 덧붙였다.

그 길이 나에게만 야성으로 연결되는 오묘한 통로는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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