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3개월 후인 1592년 7월 7일 이순신 함대는 당포항(경남 통영)에 정박하고 있었다. 목동인 김천손이 찾아와, 적 함대 70여 척이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특급 정보를 알려 왔다.
이에 다음 날 이순신은 적함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좁고 암초가 많은 견내량의 지형을 미리 알고 피한 것이다. 이어 학익진으로 적함을 포위한 뒤 포격으로 대승을 거뒀다. 김천손의 관측 사실과 견내량 지형 등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한 빠른 판단이 '한산대첩'의 비결이었다.
이순신은 정보를 귀중하게 여겼다. 그리고 사실관계를 치밀하게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작전을 세웠다. 모든 전투는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뤄졌다. 무패의 신화를 만든 힘은 정보에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손자병법 구절을 실천했다.
가천대 박동철 박사의 학위 논문인 '임진왜란 기간 충무공 이순신의 정보 활동에 관한 연구'에는 이순신의 정보 수집 수단들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이순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모았다. 핵심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휴민트'(HUMINT)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가장 먼저 적진에 파견한 첩자(정보 요원)를 꼽을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한산'에도 이 부분이 묘사돼 있다. 영화 속 임준영(옥택연)은 위험을 무릅쓰고 왜군 진영에 침투해 기밀을 빼내는 탐망꾼이다. 임준영이란 이름은 실제 난중일기에 등장한다. 그는 1597년 명량해전 때 이순신에게 왜군 함대 50여 척이 어란포(전남 해남)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또 척후장과 탐망선, 별망군 등 전술 정보팀을 운영했다. 척후장은 지역 곳곳을 정찰하는 '정보 장교'다. 탐망선은 4명 이하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빠른 첩보선으로, 이순신이 운영한 탐망선은 110척에 이른다. 별망군은 관측이 용이한 바닷가 주변 산 정상 등지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던 군사다.
목동과 어부, 구출 포로 등 자발적인 제보자의 정보도 놓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김천손이 이와 같은 사례다. 미천한 신분의 작은 첩보도 소중히 다뤘다. 이 외에도 체포하거나 항복한 왜군을 통해서도 정보를 얻었다. 아군의 전문가 집단도 활용했는데, 바다 지형과 물길에 능숙했던 어영담과 같은 장수가 대표적이다.
박동철 박사는 논문 결론에서 '어질지 않으면 간첩을 쓸 수 없다'라는 손자병법 구절을 인용한다. 이순신은 전쟁 와중에서 누구보다 백성들을 아꼈고, 제보자들도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백성과 군사가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가치 있는 정보가 지휘관에게 도달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가용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치밀함, 하나의 사실을 여러 차례 검증하는 신중함,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적의 작전을 펼치는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인간적인 따뜻함 등이 이순신이라는 '불멸의 리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한 개인의 크고 작은 판단에서부터 한 나라의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를 운영하는 대통령이라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취임 100일을 넘긴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이순신의 비결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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