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놀이터를 돌려줘]<상> 우리동네 놀이터 양극화…"대단지 신축 아파트 아니면 놀 곳이 없어요"

대구시 신축, 낙후 놀이터 32곳 분석, 낙후 시설은 놀이터 기능 잃어
최신식 놀이터엔 아기자기한 놀이 시설과 보호자 위한 쉼터 마련도
좋은 놀이터 찾아 나서지만 보안으로 문 잠근 신축 놀이터…

동구 신암동의 한 아파트 놀이터에 옷가지가 널려있다. 김세연 기자
동구 신암동의 한 아파트 놀이터에 옷가지가 널려있다. 김세연 기자

얼마 전 막을 내린 한 인기 드라마에는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이란 캐릭터가 등장한다. 학원 때문에 마음껏 놀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해 '어린이는 당장 놀아야 한다'고 외치는 그를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는 부모들도 상당하다.

어린이 해방을 가로막는 요소는 학원뿐만이 아니다. 학부모들은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공간 자체가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대구에 있는 어린이 놀이시설 대부분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고, 그중에서도 오래된 아파트의 낙후된 시설들은 아이들에게서 외면받은 지 오래다.

그나마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곳은 최근 지어진 대단지 신축 아파트 놀이시설인데 외부에선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 공공 놀이시설이 부족한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3편의 기사에 담아 준비했다.

[글 싣는 순서]

〈상〉 우리동네 어린이 놀이터 양극화

〈중〉 어린이들이 원하는 놀이터란

〈하〉 좋은 놀이터가 되려면

"학생, 거기서 담배 피우면 안 돼요."

지난 7일 찾은 동구 신암동의 한 아파트 놀이터. 이곳을 찾은 취재진에 대뜸 경비원의 경고가 날아왔다. 이곳은 지난 1988년 8월 만들어진 후 단 한 번도 리모델링되지 않아 낡은 미끄럼틀과 시소가 전부다. 위치도 아파트 단지 뒤편 구석진 곳에 창고와 경비원 휴게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경비원의 주의는 근처 벤치에 앉아 있는 대학생에게도 이어졌다. 경비원과 한동안 대치가 이어지는 사이 또 다른 남성이 놀이터 한구석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였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기자가 1시간 동안 놀이터에 머무는 동안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이곳을 찾지 않았고 철봉에 걸린 빨래만 바람에 나부꼈다. 아파트 경비원은 "밤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몰려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쓰레기장을 만들어 놓고 간다"며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놀겠냐"고 고개를 내저었다.

동구의 한 신축 아파트 놀이터. 동물 테마의 최신식 놀이터가 들어섰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동구의 한 신축 아파트 놀이터. 동물 테마의 최신식 놀이터가 들어섰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대구시 놀이터 32곳 분석…차이 뚜렷한 낙후 vs 신설 놀이터

매일신문 취재진은 지난 2주 동안 대구 도심에 있는 어린이 놀이시설 32곳을 방문해 실태를 파악했다. 방문지는 8개 구·군별로 4곳으로 한정했고, 민간과 공공시설을 절반씩 할당했다. 실태 조사 결과 조성된 지 오래된 '낙후 놀이터'일수록 민간과 공공 구분 없이 놀이시설로서 기능을 상실한 곳이 많았다.

낙후 놀이터는 아이들과 부모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놀이시설은 시소와 그네, 미끄럼틀 1~2개로 구색만 갖춘 경우가 많았고, 바닥에는 돌과 플라스틱 조각 등 이물질이 그대로 방치됐다. 시설 곳곳에 욕설이나 성적이 농담이 적힌 낙서도 가득했다.

지난달 26일 서구 내당동 삼익뉴타운아파트 인근 공원 놀이터(1980년 조성)에서 만난 학부모 A(39) 씨는 "아이가 놀이터를 지루해 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바닥에 쓰레기가 너무 많아 뛰어다니기도 불편하다"며 "고장 난 놀이시설은 몇 달째 방치되고 욕설이 적힌 낙서에 대해 아이가 뜻이 뭐냐고 물을 때가 많아 난감하다"고 했다.

일부 놀이시설은 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했다. 특히 오래된 공공시설일수록 큰 도로 옆에 있거나,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어 좁은 골목 사이로 튀어나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위협적이었다. 달성군 금포 제5어린이공원, 수성구 범물근린어린공원이 도로와 인접한 대표적인 공원이었다.

방문한 놀이터 가운데 '특별순찰구역'으로 지정된 곳도 서구 경운공원과, 달서구 춘추어린이공원 등 2곳 있었다. 바닥에는 쓰레기가 나뒹구는 등 주변 환경이 깨끗하지 못했고 어린이 대신 어른, 청소년 등이 찾는 경우가 더 많았다. 놀이터에는 놀이 기구 안내문보다 '금연', '노숙 금지' 안내문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4일 달성군 논공읍 어린이공원에서 다른 학부모 B(34) 씨는 "아이들은 놀다가 순식간에 도로로 뛰어나갈 수 있는데 도로 주변에 있는 놀이터가 많은 것 같아 아쉽다"며 "혹시나 다칠까봐 공놀이나 킥보드 등을 타지 못하게 한다"고 전했다.

반면 최신식 놀이터는 낙후된 시설과의 격차가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특히 신축 아파트 내 놀이터는 한눈에 봐도 깨끗했고, 아기자기한 놀이 시설과 더불어 부상 방지를 위해 푹신한 재질의 바닥 매트가 마련됐다. 보호자를 위해 설치된 햇빛 가림막과 소파와 테이블 등도 눈길을 끌었다.

동구의 한 신축 아파트 내 놀이터에 설치된 부모 쉼터.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동구의 한 신축 아파트 내 놀이터에 설치된 부모 쉼터.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더 좋은 놀이터 찾아 나서지만, 높은 담벼락만

위치와 안전성, 기구 노후화로 놀이터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더 좋은 놀이시설을 찾아 나선다. 목적지는 신축 아파트 놀이터다. 하지만 아이들은 담장 너머에 있는 놀이터를 바라만 봐야 한다. 보안 문제로 아파트들이 출입문을 걸어 잠근 탓이다.

지난달 25일 북구 침산동의 한 오래된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난 찾은 초등학생 5학년 2명은 "여기는 재미없다. 다른 아파트로 가자"며 뛰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른 친구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가 진짜 좋아서 거기로 맨날 간다"며 "공원 놀이터는 솔직히 다 똑같고 아파트 단지에 재밌는 시설들이 많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다행히 B아파트 놀이터 입성에 성공했지만 다른 구의 상황은 달랐다. 수성구의 한 신축 아파트는 유리벽들이 대규모 단지를 둘러쌌다. 입주민만 들어갈 수 있는 출입시스템 때문이다. 화려한 놀이시설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지만 인근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이곳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아파트 단지와 더불어 아이들의 놀이 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키즈카페와 유료 놀이공원이다. 대구 신세계백화점에 있는 대형 키즈카페와 실내 놀이터는 이용료가 1시간에 1만~1만9천원에 이르지만 평일에도 아이들과 부모들로 가득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의 놀이를 지도해주는 전문 직원도 있어서 부모가 쇼핑을 즐기는 사이 어린이들은 실내 놀이터를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다. 부모들은 안전성과 편리함에 자주 찾는다고 했다.

지난달 31일 이곳에서 만난 최현규(8) 군은 "선생님들도 잘 챙겨줘서 좋다. 놀이터에는 트램펄린이 없는데 여기는 있어서 좋다. 놀이터는 잘 안 간다. 놀이터보다는 여기가 더 재밌다"고 했다.

보호자 김모(37)씨도 "안전하고 아이들이 즐길거리가 많아 자주 찾는다. 전문 강사가 애들을 봐주는 사이 부모들은 편히 볼일을 볼 수 있다"며 "입장료가 있어서 비싸다고 생각할 때도 있으나 애들도 좋아하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놀이시설에 관한 공공성의 부재를 지적하며 놀이터의 사유화와 시설 양극화에 따른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원미 어린이 놀이지도사는 "놀이터는 어린이들의 신체 발달뿐만 아니라 친구와 관계 맺기 등 사회적 발달에 필수적인 곳"이라며 "어린이들은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친구와 함께 차별 없이 놀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이들 욕구가 충분히 반영된 공공 놀이터뿐 아니라 키즈카페처럼 갖가지 놀이시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공형 실내 놀이터도 만들어 놀이 격차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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