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타클라마칸, 고비 사막

역대 중국 왕조의 북방 '만리장성' 역할해
사구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는 신기한 월아천
세게문화유산 막고굴, 벌집 같은 석굴 즐비

고비사막은 은 몽골과 중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사막으로 역대 중국 왕조의 북방을 지키는 자연 방벽이었다.
고비사막은 은 몽골과 중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사막으로 역대 중국 왕조의 북방을 지키는 자연 방벽이었다.

타클라마칸,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 타클라마칸사막은 남으로 곤륜산맥, 남서쪽으로 파미르고원, 서쪽과 북쪽은 천산산맥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고비는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다. 고비사막은 몽골과 중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암석사막으로 북쪽의 알타이산맥, 동쪽의 둥베이평원, 화베이평원, 서남쪽으로 티베트고원이 있으며 남쪽으로 황하가 지난다. 이 두 사막은 만리장성과 더불어 역대 중국 왕조의 북방을 지키는 자연방벽이었다.

거친 바위와 흙 그리고 가시풀 듬성한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둔황, 하밀, 누란, 선선을 지나 투루판으로 들어갈 때까지 하루 예닐곱 시간씩 버스를 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에 흙바람이 불면 창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백일몽에 빠졌다. 낙타를 모는 대상(隊商)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느릿느릿 걸어가는 꿈, 혹시 전생의 내가 저 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문득 맑은 방울소리를 들은 듯 깨어나면 뿌연 먼지 가득한 지평선 위로 떠오른 신기루를 만나곤 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

고비와 타클라마칸을 관통하거나 우회해 닿은 드넓은 신장 위구르 지역은 북경에서 서안을 거쳐 황하를 따라 이어지던 난주와 무위, 장액 등 중국 여느 도시와도 생활과 문화, 환경이 이질적일만큼 달랐다.

위구르인의 외모도 고대 타림분지 일대에 정착했다는 토하라인과 몽골 초원지역 튀르크인의 후손답게 대부분 백인의 이목구비였다. 다만 건조한 기후 탓인지 살갗에 주름이 많아 한족과 달리 웃거나 수줍어하는 표정이 얼굴에 금방 드러나곤 했다.

때는 2010년, 우루무치 유혈사태가 난 바로 이듬해 여름이었던 터라, 조선족 가이드는 바짝 긴장해 거의 도시괴담에 가까운 위구르인의 만행을 열거하며 그 위험성과 주의사항을 시간만 나면 우리에게 주입해댔다. 하지만 튀르크계 무슬림 특성대로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던 위구르 노인들은 온화했고 아이들은 한없이 해맑았다. 저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린 만무하지. 오히려 정부 시책으로 급거 이주했다는 한족들의 눈빛과 표정이 더 사나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 정부의 과격하고 반인권적인 위구르 독립 탄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타클라마칸으로 들어서기 위해 들른 하서회랑 초입, 만리장성 서쪽 끝 '천하제일웅관' 가욕관의 웅장한 위용은 진시황에서 주원장까지 고대에서 중세까지로 이어진 북방 기마민족들에 대한 공포의 산물에 다름 아니었다.

한족들은 그 너머 즉 흉노족, 선비족, 갈족, 강족, 저족의 오호(五胡)와 몽골족, 티베트족, 서하(西夏)를 세운 탕구트족, 회족, 위구르족 등 사막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서역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무너지며 운다는 명사산과 사구(砂丘) 한가운데 느닷없이 나타나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압권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무너지며 운다는 명사산과 사구(砂丘) 한가운데 느닷없이 나타나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압권이다.

◆둔황(敦煌),사구(砂丘) 한가운데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

오래 떠돌다보니 이젠 새로운 곳보다 다시 가보는 곳이 편안하더란 어느 여행자의 말이 떠오른다. 동서문명의 교차로 또는 인후로 불리는 둔황이 내겐 그렇다. 시간이 나면 한 보름 정도 자전거나 빌려 유유자적 다시 지내고 싶은 곳이다. 거친 자갈사막이 끝나고 고운 모래가 바람에 무너지며 운다는 명사산(鸣沙山) 너머 노랗게 물든 노을과 사구(砂丘) 한가운데 느닷없이 나타나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月牙泉)은 압권이다.

세계문화유산 막고굴은 명사산의 동쪽 끝 깎아지른 절벽 1.6km에 걸쳐 벌집 같이 뚫린 석굴들이다. 일명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4세기 전진시대에 승려 악준이 처음 뚫었고, 원대까지 1천여 년 간 각 왕조에 걸쳐 계속 뚫고 지은 것이다. 지금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4400여 구의 소상과 연면적 약 4,500㎡에 달하는 벽화가 있는 굴이 474개다.

둔황 막고굴은 명사산의 동쪽 끝 깎아지른 절벽 1.6km에 걸쳐 벌집 같이 뚫린 석굴들이다.
둔황 막고굴은 명사산의 동쪽 끝 깎아지른 절벽 1.6km에 걸쳐 벌집 같이 뚫린 석굴들이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발견(장경동 17호굴)으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이른바 둔황문서는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처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 3만여 점이 있다. 주로 불교 관련 내용 중심으로 인도제당법 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 공사(公私)문서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때마다 다르게 개방하는 몇 개의 굴만 볼 수 있다.

백양나무와 미루나무로 둘러싸인 둔황 도심은 '녹주(绿洲)'라 불리는 오아시스다. 실크로드의 주요도시답게 야시장도 휘황찬란하다. 기념품으로 무엇을 살까 둘러보다가 조잡한 것들 뿐이라 돌아서려는데 한혈마(汗血馬) 청동상이 눈에 띈다. 가격도 적당하고 정교한 것이 허무하지 않아 친구들 선물로 정하고 10개를 달랬더니 갑자기 온 시장이 북새통이 된다. 민망해서 돌아서 나오려는데 역시 한상(漢商)이다. 차를 내오는 등 소란을 피우더니 금세 여기저기 다른 상점에서 개수를 맞춰온다.

◆인어가 되어 왕국을 지키려했던 공주

둔황에서 다시 여덟 시간 버스를 달린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거친 사막들 곳곳에서 유정, 철광, 탄광이 발견되어 신도시가 들어서고 직선도로가 끝 간데를 모르게 뻗어있다. 어둑해져서 닿은 하밀에서 하루를 묵는다. 노란 껍질을 벗긴 하미과의 달콤한 과즙이 천산남북로의 분기점이자 실크로드의 거점도시의 이름에 녹아있다. 사막이 깊어질수록 과일의 농익은 향도 깊어지더란 것도 혹시 실낱 같은 연관이 있을까.

아침 일찍 또 버스를 타고 천산으로 간다. 산 정상 분지의 바리쿤초원은 만년설과 상록수림 그리고 목초지를 우리 앞에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움막과 게르 한 채,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과 말 몇 마리를 키우며 산다고 했다. 잿빛이 살짝 섞인 마유치즈가 무말랭이처럼 소쿠리에 담겨 있다. 계절이 바뀌면 자루에 담겨 그들과 함께 거처를 옮겨갈 중요한 식량일 것이다.

하미 회왕릉은 위구르 왕의 묘지로 내부 천장의 녹색 타일이 특히 아름다웠다.
하미 회왕릉은 위구르 왕의 묘지로 내부 천장의 녹색 타일이 특히 아름다웠다.

하미 회왕릉은 위구르 왕의 묘지로 내부 천장의 녹색 타일이 특히 아름다웠다. 중원의 불교 양식과 이슬람식이 혼재된 두 채의 목조 건축물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니 모스크의 돔도 에메랄드 빛깔이다. 오전에 본 바리쿤초원 목초지는 저 돔보다 더 짙은 녹색이었단 생각이 묘하게 든다.

선선(鄯善)으로 가는 길은 황사로 부옇게 흐렸다. 위치를 자주 바꾼다는 신비로운 호수와 왕국이 사막에 휩쓸려 갈 때 인어가 되어 왕국을 지키려했던 공주의 소원이 어린 곳 누란(樓欄)이다. 영혼을 바친 공주의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국은 소실되어 옛 성터만 남았다. 한나라가 침략하여 국호를 선선으로 바꾸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이 곳을 누란이라 부른다. 1980년 철판하(铁板河)에서 발굴된 미이라 '누란의 미녀'는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아름다운 시로도 만들어졌다.

'모래산'이란 뜻의 누란 뒷산 같은 쿠무타크사막 구릉을 사륜구동차를 타고 달렸다. 속도를 늦추면 지프가 전복되니 초고속으로 달린다는 기사와는 말도 통하지 않고 나는 모래 구릉이 쩌렁 울리도록 내내 비명을 질러댔다. 아주 부끄러웠다. 인어가 된 누란의 공주와 미이라로 발견된 누란의 미녀 생각따윈 할 겨를도 없었다. 차에서 내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채 짐짓 딴청을 부리다가 누란의 공주 또는 미녀의 현현(顯現)이랄까, 여태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이의 그네를 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행 모두를 불러 그녀를 둘러싸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칭송했음은 물론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일행들은 그 이후 전혀 기억하지 않았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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