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내가 보는 가야사] 허왕후의 현대적 의미

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배필,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허왕후 출자국 두고 숱한 논쟁…조선 이긍익 "아유타국서 왔다"
남천축국, 서역의 허국 주장도
김석형 "가야 분국 북규슈 출신"…이종기, 인도 아요디아 왕국설
수천년 전에 이뤄진 국제 결혼…인도선 무용극으로도 만들어져
열린 민족주의 선구 역할 톡톡

허왕후 영정.
허왕후 영정.

▶이동설과 난생사화

우리 고대국가의 시조들은 대부분 다른 곳에서 이동해왔다. 부여의 시조 동명은 고리국(탁리국)에서 이주해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고,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또한 우리 고대국가의 시조들은 대부분 알에서 태어난 난생사화(卵生史話)의 주인공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시조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백제 시조 온조는 알에서 나온 주몽의 후예이기에 직접적인 난생사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난생사화의 후예이니 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뿐만 아니라 동이족 상(商:은)나라도 난생사화이고, 베트남의 문랑국(文郞國)도 난생사화다. 시조를 알에서 나온 인물로 신성시하는 것은 하늘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새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중보자(仲保者)로 여기는 사고에서 난생사화가 나왔다. 그러니 한국 고대국가의 개국시조는 그 지역 출신이 아니라 하늘, 곧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이다.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그런데 가야는 특이하게도 시조의 부인까지도 다른 곳에서 왔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김수로왕을 추대한 구간(九干)이 자신들의 딸 중에서 장가들기를 청하자 수로왕은 하늘에서 배필을 보내줄 것이니 염려말라고 답했다. 가락국기의 특징은 날짜까지 정확하게 적시한다는 점인데, 서기 48년 7월 27일 허왕후가 가야에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허왕후는 침전에서 수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던 금년 5월 중 부왕과 황후께서 저를 돌아보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를 뵈었는데,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락국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대보(大寳)를 다스리게 했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서 배필이 되게 하라』라는 말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오히려 귓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이에 부모를 떠나 그곳을 향해 가라'고 하셨습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인도 아요디아, 허왕후가 왔다고 추정하는 곳이다.
인도 아요디아, 허왕후가 왔다고 추정하는 곳이다.

허왕후의 출자국 '아유타국'이 어디인가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숱한 논쟁이 있어왔다. 현재 한국의 대학 사학과를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허왕후는 물론 김수로왕도 모두 '가짜'라고 부정하기에 급급하지만 조선의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연려실기술에서 서기 48년 7월 '허왕후가 아유타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기 전까지 이 부부를 가짜라고 부인한 학자는 없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부인론은 곧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이 김수로왕과 허왕후를 부인한 것은 가야가 곧 야마토왜의 식민지 임나라고 왜곡하기 위해서였다.

김해 만산도, 조선 후기 문건인데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봤다는 망산도로 추정한다. 가야문화진흥원 도명 스님 제공.
김해 만산도, 조선 후기 문건인데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봤다는 망산도로 추정한다. 가야문화진흥원 도명 스님 제공.

▶남천축국에서 왔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보다 몇백 년 이른 시기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김해부조는 허왕후릉(許王后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지산(龜旨山)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비는 아유타국 왕녀라고 한다.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고 한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인데,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부른다. 고을 사람들이 수로왕릉에 제사할 때에 함께 제사한다."

이 기사는 허왕후의 출신지를 '남천축국(南天竺國)'이라고 말하고, 또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나오지 않는 '보주태후'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은 건국 후 국가차원의 지리지 편찬사업의 하나로 동국여지승람 제작에 착수해 성종 12년(1481) 50권을 완성했다가 중종 25년(1530) 내용을 더 추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간행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허황후의 출신지를 '남천축국', 곧 남인도라고 보았다.

허왕후를 시조모로 여기는 양천(陽川) 허씨인 조선의 허목(許穆:1595~1682)은 '가락국 보주 허태후 묘비음기(墓碑陰記)'에서 "보첩(譜牒:족보)에는 아유타국 군주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금관국의 고사에는 혹 남천축국 군주의 딸이라고도 하고, 또 태후 자신이 스스로 서역(西域)에 있는 허국(許國) 임금의 딸이라고 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허왕후를 남천축국 군주의 딸로 보는 근거는 금관국의 고사라는 것이다. 서역은 보통 중국의 서쪽을 의미하니 허왕후의 출자에 대해서 '아유타국, 남천축국, 서역의 허국' 세 군데를 들고 있는 것이다.

▶북한 학계의 북큐슈설

대구 출신의 월북학자 김석형(金錫亨:1915~1996)은 허왕후가 북큐슈에 있었던 가야의 분국 출신이라고 보았다. 김석형은 1963년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을 발표했는데 가야는 물론 백제·고구려·신라인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 분국(分國)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중 임나는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 세운 분국이라는 것이다.

일제 황국사관은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는데, 김석형은 거꾸로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 임나를 세웠다는 분국설을 주장했다. 현재 남한 강단사학계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가야설'을 정설로 여기지만 북한사학계는 가야가 일본 열도에 세운 분국이 임나라는 분국설이 정설이다.

김석형은 1966년 '초기조일관계사'에서 "(허왕후가) 남해에서 왔으니 응당 북규슈를 거쳐 왔거나 북규슈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허왕후는 가야가 큐슈에 설치한 분국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큐슈의 유적·유물들로 볼 때 가야 분국은 3세기 말 이후에나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인도 아요디아 왕국? 보주는 사천성?

문학가이자 민족사학자였던 이종기는 '가락국탐사(1977)'에서 인도 갠지스 강 중류에 있던 아요디아 왕국이 허왕후의 출자국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서기 20년경 아요디아 왕조는 쿠샨왕조에게 수도를 함락당해서 어디론가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종기는 허황후는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허왕후의 출발지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에 태국 메남강가에 건설한 식민도시 아유티야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을 지낸 김병모는 조선시대 문적에 나오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칭호에 주목했다. 그는 '김수로왕비의 혼인길(1999)'에서 허왕후 일행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난을 피해 현재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 일대인 옛 보주(普州) 일대로 이주했고, 서기 47년 한나라에 저항하다가 강제로 추방당한 후 양자강과 상해를 거쳐서 서기 48년 가야에 도착했다고 보았다.

▶허왕후는 열린 민족주의의 선구
이처럼 허왕후의 출자에 대해서는 백설이 난무하다. 그런데 대일항전기 천도교 계통에서 발간하던 '별건곤' 1934년 1월호에 수춘산인(壽春山人)이 쓴 '4000년사 외교, 역대왕비 공주편'이 주목된다. 그는 '허왕후가 인도의 아유타국 왕녀(혹 남천축국왕녀라 한다)로 풍랑에 표박하여 조선에 온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조선 사람은 아직도 옛날 쇄국시대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떤 남자가 외국 여자와 결혼을 한다든지 또는 어떤 여자가 외국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누구나 해괴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 이전에는 도리어 그러한 관념이 없어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 외국여자와 결혼한 일이 많이 있었다."면서 허왕후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이는 현재의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한국으로 시집갔다고 믿고, 인도의 전통 무용단인 '카탁'에서는 이를 주제로 한 무용극까지 갖고 있다. 인도 허왕후가 15억 인도인과 8천만 남북한 사람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사는 실체가 가장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 해석도 중요하다.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국제결혼은 현재 저출산에 허덕이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열린 민족주의의 선구이다. 필자는 남한 강단사학계가 허왕후를 가짜로 모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역사학인지를 묻고 싶다.

세상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역사도 효용성이 있어야 한다. 허왕후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와 있는, 또는 이 땅에 오고자 하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허왕후는 열린 민족주의라는 용광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가야 사람들은 모든 인류가 한 민족이라는 사해동포주의를 실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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