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26의 진실' 방아쇠 당긴 김재규…배후는 미국?

소설가 김진명, 대통령 시해 고의성 주장
박정희, 주한미군 철수 방침 반대…美 카터 행정부·중앙정보국과 마찰
당시 정권 대체 세력에 전두환 주목
김재규·CIA 밀접한 관계 맺은 사이…체포 후 조사서 "뒤에 美있다" 발언
우발적 시해 아닌 기획 가능성 있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관객 1천만을 돌파하자 실제 상황, 1980년 오는 듯했던 서울의 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자연스레 서울의 봄에 대한 기대감을 잉태케 한 10·26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로 70년대 한국의 핵개발 프로젝트 뒷 이야기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던 소설가 김진명 씨가 유튜브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이 우발이 아니라 기획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10·26이 우발적 사건이라고 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주장과 달리 10·26 사건 현장을 복기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 김 씨 주장의 요지다.

즉 김재규가 10·26 당일 저녁 사건이 있기 전 미리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궁정동 안가에 불러 놓았고, 중정 요원들을 시켜 경호원들을 제압한 것이나 피묻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김재규가 정승화를 태우고 남산의 정보부로 안 가고 용산의 육군본부로 간 것 등 일련의 사건들이 한 개인이 일으킨 사건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 씨는 김 전 부장 배후에 더 큰 세력이나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게 미국이 아니냐는 것.

김 씨도 특정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에 나서고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미친 짓'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극도로 싫어한 카터 행정부와 미 중앙정보국(CIA)이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 근거로 김 씨는 지미카터 방한 때의 일들을 거론했다. 박 대통령은 김포공항으로 카터 대통령 영접에 나갔다가 바람맞을 뻔한 일도 있다고 했다. 카터가 박 대통령을 안 보고 헬기타고 미군부대 가서 자겠다고 했다는 것. 결국 박정희는 카터가 헬기타는 곳까지 걸어가 악수를 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문제는 다음날 청와대 회담이었다. 박 대통령이 카터에게 엄청나게 반격을 했기 때문이다. 요지는 '주한미군 철수는 미친 짓이다. 한반도를 말아먹을 일이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파상공격에 카터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고 한다. 카터는 화를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이 박정희 정부를 대체할 세력으로 주목한 것이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4년제 정규 대학 과정을 마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사 11기라는 것이다. 이들을 미국이 일찌감치 관리대상으로 봐두었다는 것.

박정희가 없으니 이제 민주주의가 오겠다고 당시 많은 국민들은 생각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박정희의 바로 뒤에 민주주의 정부가 오는 건 위험하다고 봤다.

군부의 뒷받침이 없는 김영삼 김대중의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불가능하다고 봤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이다. 박 대통령의 부재에도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김 씨는 또 김재규가 미국 CIA의 관리대상이었을 거라고 봤다.

10·26 전 해군 제독 출신의 CIA 터너 국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해 극진한 대접을 받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터너는 김재규를 위해 마이애미에 배를 띄우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터너는 김재규에게 당신 영어를 너무 못한다고 충고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당신이 영어를 못하니 답답해서 그런다고 하며 나중에 개인 영어 가정교사를 보내주었다.

그 사람이 미군 중위였는데 역시 CIA 요원이었다. 10·26 이후의 시기를 연구하는 데 그 역할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

당시 김재규의 방미 목적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반대 여론 환기였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에 남북한 군사력 비교라는 보도가 나가고 워싱턴 정가에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는 미친 짓이라는 비판여론이 비등해지고 그때 주한미군 참모장이던 존 싱글러브 소장도 카터는 정신병자다라며 들이받는다.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에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 여론 잠재우기 그것 밖에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김재규와 CIA의 관계가 그 이상일 거라는 거다.

10·26일 심야 육군본부 벙커에서 보안사에 체포돼 보안사로 연행된 김재규의 조사를 한 사람은 신동기라는 수사관이었다. 김재규가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미국을 들먹이면 죽는구나' 생각하고 김재규는 선고 재판정에 갈 때까지 미국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재판에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 등장한다. 잔 천 이라는 미군 중령,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다. 한국인으로 이름은 전진한. 서울대 영문과 다닐 때 CIA에 포섭을 당했고 미군 대위 신분으로 일본의 태평양사령부에 와 있을 때 5·16이 일어나 한국으로 온다.

박정희는 잔 천과 2시간을 울면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그 때 잔 천에게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뜻을 일으킨 사람이지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당시 미국의 걱정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이지 않느냐는 거였다. 잔 천은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미국에 보고했다. 그 일로 잔 천은 박정희에게는 둘도 없는 은인이 되었다.

그런 잔 천이 중령일 때 10·26이 일어났다. 잔 천은 10·26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잔 천은 10월 29일 갑자기 전역을 해버렸다.

한국과 미국이 발칵 뒤집어져 있는 이 때 정보공작 책임자가 전역을 해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김재규는 또한 대한민국에서는 요인 130명만 연행하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쿠데타 도상 연습도 해봤다는 게 김재규 측근 중의 측근이라는 김학호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라는 사람의 주장이라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헌병들에게 연행되고 있다.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헌병들에게 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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