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죽음을 선택할 권리

모현철 디지털국 부국장
모현철 디지털국 부국장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막장 부부의 사연이나 불륜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서로를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부부도 있는데,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나그네로 변신해 인간 세상을 여행하던 제우스를 반갑게 맞아 주고 정성스럽게 대접해 줬다. 소원을 말해 보라는 제우스에게 필레몬은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먼저 죽어 다른 사람이 슬픔 속에 살아가지 않도록 두 사람이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제우스는 흔쾌히 소원을 들어주었다. 부부는 오래오래 사이좋게 살다가 어느 날 몸에서 나뭇가지가 돋아나는 것을 느끼고 헤어질 때가 됐음을 직감한다. 이들이 서로에게 사랑과 감사의 말을 전하는 순간 나무껍질이 그들의 입을 덮었고 결국 한 쌍의 나무로 변했다.

신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가 등장해 화제다.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가 지난 5일 자택에서 동반 안락사로 임종을 맞았다. 93세 동갑내기인 부부는 함께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판 아흐트 전 총리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했고 부인도 지병 끝에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와 달리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한국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지만 의사가 약물 투여 등으로 환자를 죽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 의사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2022년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8천720명으로, 이 중 동반 안락사는 58명(29쌍)이었다.

한국에서도 환자와 가족의 고통이 갈수록 커지고 '간병 살인' 같은 비극이 일어나면서 안락사 법적 허용을 찬성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021년 서울대병원 조사에서 국민 76%가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 자살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관련 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통과되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거장 감독 장 뤼크 고다르처럼 외국인의 의사 조력 자살이 허용된 스위스를 찾아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지난 7일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랜 75'는 노인이 직접 죽음을 선택하고 국가 차원에서 이를 적극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담았다.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는 관람객의 평이 눈길을 끈다. 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한다. 안락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는 이유다. 그렇더라도 안락사가 미화되는 분위기는 경계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지속적인 삶을 추구할 권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조력 자살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행동은 위험하다.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는 왜 제우스에게 불로장생을 빌지 않았을까? 노화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화와 죽음을 거스르기보다 받아들이고 존엄한 죽음을 선택했다. 한국은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노인인구 20% 이상)가 된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7년이다.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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