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야학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나이가 들어 뭔가를 할 때 '노익장(老益壯)'이라는 진부한 수식어를 붙인다. 후한의 명장 마원이 주인공인 고사다. 반란군 토벌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왕에게 간청했던 그의 나이는 예순둘이었다. 왕이 주저하자 마원은 "궁할수록 굳세어지고 늙을수록 더 건장해야 한다(窮當益堅 老當益壯)"고 말하며 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최근 방영된 대하드라마로 다시 주목을 받은 강감찬 장군도 일흔하나의 나이로 귀주대첩에 나선다. 8년간 전쟁에 대비해 온 터였다. 준비된 자를 하늘도 돕는다는 역사의 증언이다. 뜻을 세워 이루는 데 나이는 걸림돌이 못 된다. 늦었다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교훈도 담겼다.

"난 이미 늦었어"를 영화 속 클리셰 정도로 치부하는 곳 중에 '야학(야간학교)'이 있다. 20세기 유물인 줄 알았던 야학이 아직도 있냐며 놀라는 이들도 있지만 개교 70년을 넘긴 대구 삼일학교를 비롯해 대구경북에는 두 손으로 세야 할 만큼의 야학이 남아 있다. 야학을 찾는 이들은 대개 배움의 때를 놓친 60~70세 어르신이다. 이들에게 배움은 집념에 가깝다. 드라마가 제아무리 재미있어도 밤 시간대를 책과 씨름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러 오는 이들도 있다. 피곤을 못 이기면서도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제때 배우지 못한 게 한(恨)이었다. 때가 되면 공부를 다시 하겠다며 마음속으로 몇백 번을 다짐했다 보니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소 힘줄보다 질긴 의지로 배우려 드니 배우는 모든 것이 새롭다. 예순이 훌쩍 넘어 한글을 깨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등단 시인 뺨치는 감성으로 지난 삶을 써낸다. 행간에서 드러나는 삶의 역정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세네갈에서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예의 바르게 표현할 때 '그 사람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한다는데 비유컨대 이들의 삶을 '의지의 도서관'이라 불러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예천군 공무원들이 '퇴근길에 공부하자'라는 '예천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일과 시간 후에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쉬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니 직장인들에게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승진이나 학위를 보장하는 것도 아닌 마당에 '열공 모드'라고 한다. 새로운 의지와 열정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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