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한 한 할아버지의 절규 "제주 4.3을 아십니까?"

[오인권 할아버지] 이념 논쟁이 아니라 그곳에서 쓰러져 간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제주의 간절한 목소리

오인권 할아버지가 지난달 30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에 위치한 '제주 4.3 성산읍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학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제공 제주일보
오인권 할아버지가 지난달 30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에 위치한 '제주 4.3 성산읍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학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제공 제주일보

'제주 4.3 ○○○○'

제주도민의 가슴에 한 서린 기억으로 남아 있는 '4.3'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학살된 사건이다.

지난 2000년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이 됐지만 입법취지 달성은 더디기만 하다.

심지어 제주 4.3을 규정하는 명칭조차 아직 확정하지 못 했다. 어떤 사람은 '양민학살'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반란사건'이라고 부른다. 특별법에선 중립적인 단어인 '사건'을 사용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이 시작됐고 봄꽃과 함께 당시 비극에 대한 트라우마가 제주에 상륙했다. 제주 4.3 76주년을 맞아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의 협조를 받아 제주 4.3 피해자를 만났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제주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인 '성산일출봉' 인근에서 지난달 30일 만난 오인권 할아버지(76)는 삶 자체가 제주 4.3이다.

지난 1949년 2월. 바람이 거센 바닷가 성산포 터진목.

오 할아버지를 품에 안은 어머니는 동네 이웃주민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 왔다. '생후 17개월의 갓 난 아이까지 안고 있는 부녀자도 있는데 설마 해코지를 하지는 않겠지!' 라는 일말의 기대는 빗나갔다. 경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참히 총을 쏘아댔다.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오 할아버지도 세 발의 총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됐다. 그렇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머니 주위를 맴돌며 울고 있던 오 할아버지는 시신이라도 수습하러 온 주민들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제주에서 경찰생활을 막 시작한 아버지가 이웃 사람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라는 명령이 싫어서 경찰직을 내려놓으면서 우리 가족의 불행은 시작됐다"며 "부친을 향해 우격다짐으로 폭도라고 한 주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기정사실'이 되고 우리 가족은 부친 동료의 손에 총살을 당했다"고 회상했다.

오인권 할아버지가 지난달 30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에 위치한 '제주 4.3 성산읍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학살 당시 자신을 안고 있었던 어머니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사진제공 제주일보
오인권 할아버지가 지난달 30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에 위치한 '제주 4.3 성산읍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학살 당시 자신을 안고 있었던 어머니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사진제공 제주일보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목숨을 건졌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오 할아버지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고아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연좌제까지 얹어졌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와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에는 분을 참지 못 해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짓'도 했다고 한다.

오 할아버지는 "저의 초년 얘기가 극적이어서 제가 말할 기회가 많은데 제주에 저처럼 더없이 고단한 삶을 산 동년배들이 부지기수"라며 "제주 4.3이 어떠어떠한 사건이어야 하는 사람들한테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겠지만 우리는 그 모진 세월을 눈물과 한으로 살아냈다"고 오열했다.

굴곡진 현대사를 묵묵하게 견뎌낸 선물이었을까, 오 할아버지는 4.3 당시 폭도로 몰려 아버지가 총살을 당한 지 60여년 만에 시신을 수습해 모친 묘소 옆에 모실 수 있었다. 특히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재작년에는 제주 4‧3 희생자 국가보상 결정을 받기도 했다.

오 할아버지는 "제주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이 받은 교육에 따라 다양하지만 당시를 살아낸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며 "그저 '사람'의 시각에서 4.3에 대한 접근이 이뤄지고, 늦었지만 희생당하신 분들과 다친 분들에 대한 깍듯한 예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제76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거행된다. 그동안 제주 곳곳의 아름다운 관광지에서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랜 경험이 있다면 이제 그 터를 지켜온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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