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시속으로] 슬픔에 북받친 그들이 말했다, “전쟁의 고통을 많이 알려주길”

대구 출신 케냐 거주 사진가 김병태 개인전 ‘자화상’
우크라이나 난민 보호소 사람들의 얼굴 사진에 담아
4월 25일부터 5월 15일까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김병태, Naralia & Angelina Puzii.
김병태, Naralia & Angelina Puzii.
김병태, Eduard & Andrii Tkachenko.
김병태, Eduard & Andrii Tkachenko.

때로는 직접적인 외침보다 절제된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내포한다. 김병태 작가의 사진이 꼭 그렇다. 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실루엣만 드러난 사람들의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슬픔을 억누르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구 출신으로, 1994년부터 케냐 나이로비에 거주하며 30여 년간 아프리카의 자연과 인물을 담은 작업을 이어온 김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직면한 이들의 참혹한 고통과 아픔을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최근 사진 전문 갤러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대구 남구 이천로 139)에서 만난 작가는 "많은 이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정치적인 부분만을 얘기하거나, 남의 동네 불구경처럼 안타깝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사건에 지나지 않는 듯 얘기하더라"며 "왜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돼야하는지, 또한 그들의 아픔과 생명의 가치,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고민은 없어보여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개인전을 앞둔 김병태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개인전을 앞둔 김병태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그는 지난해 9월 어렵게, 또 조심스럽게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난민보호소를 찾았다. 가족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집이 파괴돼 피난을 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곳엔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뿐입니다. 애써 보통의 일상처럼 지내려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니 슬픔과 분노가 밀려오더군요. 무엇때문에 한 순간에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산산조각 나고, 생명을 건 도피를 해야했는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이 유독 밝게, 거칠게 표현된 것은 얼굴에 밀가루를 뿌렸기 때문. 밀가루는 그들의 고통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이면서도, 우크라이나의 주 생산품으로써 그들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희망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과,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사진의 공통된 특징이다. 작가는 "케냐에서도 이 '자화상' 시리즈를 작업한 바 있다. 눈동자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것보다, 관람객들이 사진 속 사람들의 내면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눈을 감긴 채 찍었다"고 했다.

삶이 파괴된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까 하며 걱정했던 김 작가에게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우리가 처한 얘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길 바랍니다."

그들의 말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의 목적이 단순히 작품 발표가 아닌 어딘가에서 차별과 편견, 소외와 폭력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 그에 대한 연민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나아가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오랜 기간 사바나에 머무르며 깨달은 바가 많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삶과 죽음의 순간이 수시로 목격되지만, 소수의 이기심과 탐욕에 의해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 경우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며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따라 삶의 큰 부분은 이미 결정이 되고, 자유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한계에 부닥치는 현실이 잔인하고도 슬프다"고 덧붙였다.

한국-케냐 수교 50주년, 56주년 기념 초대전과 케냐 나이로비국립박물관 초대전 등의 이력을 지닌 그의 사진전 '자화상'은 25일부터 5월 15일까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펼쳐진다. 일, 월요일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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