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17)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 수도원(Schlierbach Abbey)

수도원에 딸린 작은 동네 슐리어바흐…베리사유 궁전처럼 금박 입힌 교회
텅 빈 공간 속 역사의 무심함 깨닭아

슐리어바흐 수도원은 알프스 기슭의 그림 같은 클렘스탈 계곡에 위치해 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은 알프스 기슭의 그림 같은 클렘스탈 계곡에 위치해 있다.

장자는 어떤 것에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의 경지를 소요자재(逍遙自在) 또는 소요유(逍遙遊)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이라고 했다. 장자는 이 세 종류의 사람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인은 사심이 없고, 신인은 공적이 없고, 성인은 명예가 없다."

수도원을 탐방하는 동안 수도승이야말로 장자가 말하는 지인이고 신인이고 성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가질 수가 없으니 사심이 있을 수 없고,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니 개인의 공적은 무의미하고, 세속을 버렸으니 명예가 자리할 곳이 없지 않은가.

◆알프스 기슭 작은마을에 있는 수도원

이번 수도원 탐방의 마무리는 남부 독일 뮌헨 남서쪽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서 할 생각이었다. 상트 오틸리엔에서 파송된 신부님과 수도승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 베네딕트 수도원, 그 원형을 상상해 보고 싶었다. 1909년 서울 혜화동에서 최초 남자 수도원인 백동 수도원이, 필자의 고향 근처에 있는 베네딕트회 왜관 수도원의 내력이 상트 오틸리엔에 있지 않은가.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며칠 머물며 이번 탐방의 마지막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수도원 예배당의 웅장한 바로크 건물이었고, 수도승들의 숙소는 궁전 같았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수도원 예배당의 웅장한 바로크 건물이었고, 수도승들의 숙소는 궁전 같았다.

남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그리며, 천 교수와 필자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슐리어바흐를 향했다. 슐리어바흐는 레스토랑 조차 찾기 힘든 작은 마을이었지만 역사는 깊고, 알프스 기슭의 그림 같은 클렘스탈 계곡(Kremstal Valley)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는 슐리어바흐를 향해 달렸지만 작은 동네는 거대한 슐리어바흐 수도원에 가려 존재감이 없었다. 슐리어바흐는 그냥 수도원에 딸린 작은 동네 같았다.

태양이 내리쬐는 한여름 이른 오후에 슐리어바흐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수도원 문은 꽁꽁 닫혀 있었다. 수도원 입구에서 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벨을 눌러 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도원 안에도 수도원 밖에도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천 교수와 필자는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인적 없는 시골 동네에서 막연하게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분명히 이곳에서 2박 3일을 체류한다는 것을 이메일로 소통을 했었다. 하지만 수도원 문은 굳게 닫혔고,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알릴 곳이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 때, 수도원을 향해 중년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그녀는 수도원 정문을 열고는 우리를 수도원으로 안내했다.

드디어 슐리어바흐 수도원에 발을 들여놓었다. 수도원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수도원 예배당의 웅장한 바로크 건물이었고, 수도승들의 숙소는 궁전 같았다. 수도원은 규모가 얼마나 큰지 정문에서 우리가 머물 숙소까지는 수백 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수도원 예배당의 웅장한 바로크 건물이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수도원 예배당의 웅장한 바로크 건물이다.

◆시토회 수도원

슐리어바흐 수도원(Schlierbach Abbey)는 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 마을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이다. 수도원은 1355년 수도원장 엘리자베스(Elisabeth)와 재산을 기부한 12명의 수녀들에 의해 처음에 수녀원으로 설립되었다. 개신교 종교 개혁 기간, 수녀원은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쇠퇴했고, 1556년에 수녀원은 문을 닫은 후, 64년간 방치되었다. 심지어 수녀원장이 개신교 종교 개혁을 추종해, 슐리어바흐 지역 주민들에게 개신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 후 황제 페르디난드 2세(1578-1637)의 명령에 의해 슐리어바흐 수녀원 건물에 시토회 수도승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1620년에 스티리아(Styria)의 레인 수도원(Rein Abbey)에서 온 세 명의 시토 수도승이 수도원을 재건해,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그 지역을 굳건하게 세워갔다.

현재의 수도원은 1672년과 1712년 사이, 특히 수도원장 베네딕트 리거(1679~95)와 니바르 디에러(1696~1715)의 지휘 하에 바로크 양식으로 웅장하게 재건했다. 수도원장 리거는 교회당 천장과 벽을 예술품으로 만들었다. 교회당의 벽과 천장을 장식한 수많은 나뭇잎, 꽃, 과일, 그리고 천사와 성인상들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수도원장 니바르는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수도원 교회당을 꾸몄다. 수도원 기둥에 금박을 입힌 조각과 꽃 정물화를 추가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생각하며, 수도원 교회를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수도승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아침과 저녁 기도회 때 수도승들을 잠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수도원장의 배려로 수도승들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다. 수백명이 머물러도 부족함이 없는 공간에 단지 10여 명의 수도승과 우리 두 사람이 전부였다. 새벽 기도와 밤 기도 시간, 우리는 텅 빈 공간을 오가며 역사의 무심함을 느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 교회 내부
슐리어바흐 수도원 교회 내부

◆자유로운 식사시간

아침 식사 시간은 짧았고, 수도승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에는 식사 예전은 없었다.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에는 독특한 식사 예전이 있었다. 수도승들의 식탁과 방문객의 식탁이 구분돼 있었다. 그리고 식사 때면 한 분 수도승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성경이나 경건서를 낭독했다. 수도승과 방문객은 침묵 속에 식사를 진행했다. 솔렘 수도원에서 우리는 고요 가운데 영의 음식과 육의 음식을 동시에 먹었다.

그러나 슐리어바흐 수도원 식사는 자유로웠다. 우리는 수도승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자유롭게 식사했다. 수도원에서 생산하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치즈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며칠간 많은 수도승과 대화를 나눴지만 유독 젊은 수도승 요한과의 대화가 또렷하다. 그는 10대 후반 정도인 앳된 수도승이었다. 맑은 눈과 깨끗한 마음 때문인지, 그와 나눈 대화는 아직도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이곳 수도원은 사업이 많았다. 치즈 공장, 스테인드글라스 공장, 와인 등. 그래서 그런지 아침 식사가 끝나면 수도승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각자 맡은 사업장에서 일하다 저녁이 돼야 돌아왔다.

알프스 깊은 계곡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수도원 입구에 있는 유리 공장을 찾았다. 숙련된 기술자들이 자유 자재로 유리 제품을 다루고 있었다. 유리 십자가,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예술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유리에 채색된 원색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는 유리에 금속 산화물을 녹여 첨가하여 착색된 유리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 미술로 건축 양식과 함께 발달했다. 현대 건축물에도 아키텍쳐 글라스로 불리며 건축 미술의 한 분야가 되었다. 무엇보다 슐리어바흐 수도원 유리 공장의 스테인드글라스 기술과 전통이 한국교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유리로 만든 성화.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유리로 만든 성화.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유리로 만든 성화.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유리로 만든 성화.

◆스테인드글라스로 한국과 연결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선구자 이남규 작가의 작품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당인 명동 성당 입구의 문 세 개 가운데 중앙문 위의 아치형 창문에 새겨져 있다. 중앙의 하얀 십자가에 둥근 성체가 묘사돼 있다. 십자가 둘레에 그려진 세 마리의 비둘기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 바깥 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상징하는 포도송이와 밀 이삭을 그려놨다. 우리 전통의 색을 사용해서 따뜻하면서도 단순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남규 작가가 슐리어바흐 수도원 유리공방에서 유리화를 배우고,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익혔다. 이남규 작가를 작품 세계를 잇는 사위 박정석 작가도 슐리어바흐 수도원 공방에서 유리화를 공부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과 이곳이 이렇게 스테인드글라스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년의 시간,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을 뛰어넘는 종교와 예술의 힘이 여기에 있지 않는가! 아무 것에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수도승의 세계가 수도원의 역사와 예전뿐 아니라 건축과 예술에도 이렇게 녹아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그 세계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도원에 발을 들일 때마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러면 어떠랴,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진정한 소요유(逍遙遊)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유재경 영남신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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