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조선시대 인물이라면 김시습 아닐까? 천재도 누가 인정하느냐에 따라 급이 다를 수 있고,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불운도 각양각색이지만 이 두 가지가 김시습에 필적할만한 인물은 흔치 않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 태어나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아 외할아버지가 '천자문'을 가르쳤다. 세 살 때부터 시구를 지었고, 다섯 살이 되자 신동으로 서울 장안에 소문이 자자해 오세(五歲), '다섯 살짜리'라면 김시습인줄 알았다. 소문은 궁중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도승지를 시켜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시험하게 한 후 그 천재성을 칭찬했다. 세간의 전설에 의하면 이 때 비단 50필을 하사 받았는데 혼자 가져가라고 하고 어떻게 하는가 보았더니 비단 필을 풀어 끝과 끝을 모두 이은 뒤 허리에 묶어 다 가지고 갔다고 한다.(비단은 좀 상했을 듯하다.)
그의 나이 열아홉, 첫 과거시험에 낙방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격하돼 영월에 유폐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은 과거에 급제해 임금을 도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한 치군택민(致君澤民)이라는 그의 목표를 부숴버렸고, 어떻게 살아야하나 라는 깊은 고민을 남겼다.
임금이 무도한데 공부는 해서 무엇 하나? 김시습은 방성통곡(放聲痛哭) 끝에 책을 불사르고 정처 없이 떠났다. 똥통에 빠졌다 나오는 세리머니가 있었다고도 한다. 김시습은 박학능문(博學能文)의 문장가를 넘어 옳고 그름의 문제를 사색한 진정한 천재였다.
20대에 승려 차림으로 개성, 평양, 순안, 영변 등 관서와 내금강, 오대산, 강릉 등 관동에서부터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를 떠돌았다. 경주에 이른 28세 때 정착할 결심을 하고 금오산(남산) 용장사에 자리 잡았다. 38세 때 상경하였고 이후 여러 곳에 머물다 47세 때 환속해 결혼까지 했으나 2년에 그쳤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다시 승려의 모습으로 떠돌다 59세로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무량사 소장인 작가 미상의 '김시습 초상'은 비단 바탕이 좀 낡았지만 필치가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전문 초상화가의 솜씨다. 옷은 사대부의 일상복인 도포이고, 꼭대기가 둥근 검은 갓을 썼으며, 갓끈은 크고 작은 구슬을 번갈아 꿴 장식끈이다. 양 눈썹 사이의 깊은 주름과 정면을 응시하는 우울한 눈빛이 그의 내면을 비춰주는 듯하다. 분홍빛 도포는 가는 필선의 옷주름이 적절하게 단순화되고 추상화돼 담백한 분위기를 더한다.
갓과 도포 차림으로 두 손을 맞잡은 이 반신상은 17세기의 유학자 초상 양식이다. 김시습은 20대부터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승려였으므로, 이 초상화는 김시습의 실상과 맞지 않다. 그러나 생육신의 한 분인 절의지사(節義之士)라는 우리의 기억과는 잘 맞는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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